좀 잡을 수 없어
부정적인 감정은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 게 좋다. 그게 목구멍까지 차오를 일이 아니라 일순간의 느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언어는 태도를 재단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표현되어야 한다. 카타르시스(감정적 정화)의 효용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감정은 표현하지 않으면 그 대상을 좀 먹을 수 있다.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그녀다. 덕분에 옆지기와 나는 녹초가 되었다. 토요일도 그리고 오늘도 그랬다. 그녀는 선물 같은 미소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때론 찢어질듯한 울음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심하게 헤집어 놓는다.
그녀에 관한 부정적인 감정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분유를 끊고 이유식을 먹는 요즘 밥 먹이는 시간은 마치 전쟁과 같다. 무엇이 불만인지 식사 의자에서 앉았다 섰다 하며 돌고래 소리를 연신 내지르는가 하면, 닭똥 같은 눈물을 투둑투둑 흘린다.
오늘도 옆지기와 내가 갓 준비한 이유식을 받아 들고 지아는 그랬다. 몇 분이 지났을까? 울며 손으로 밥을 다 헤집어 바닥으로 투둑투둑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마음이 욱했다. 상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먹지 말라고, 다음 식사시간까지 먹을 건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간식도 안 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과거 그녀가 7-8개월 때쯤일까? 그날은 혼자 육아를 하는 날이었는데 도통 이유식을 먹지 않고 큰 소리로 울기만 했다. 가까이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귀도 너무 아프고 먹여야 한다는 내 의지를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다. 난 그녀가 앉아있던 아기용 의자에 화를 실어 옆으로 밀어버리고 한참을 그녀와 눈 맞추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는 더 크게 울었다.
그날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그녀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니지만, 의자를 민 화 섞인 행동은 그녀를 향한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내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처럼 부끄럽고 아비 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오늘 꼬장 부리는 그녀를 보며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화가 불쑥 솟아올라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게 있었는데, 바로 옆지기가 함께 했다는 것이다.
“말도 못 하는데, 자기는 얼마나 힘들겠어. 브로콜리가 맛이 별론가보다…김하고만 밥 먹네. 김하고만 밥 먹을 거야? 엄마 아빠 밥 값은 줄겠다. 김만 사면 되니깐.”
옆지기는 그녀가 울면 왜 그런지 살피는 듯했다. 힘든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힘들다는 마음이지 나처럼 화나는 마음은 묻어있지 않았다.
“먹기 싫어? 그럼 우유라도 조금만 먹어보자. 이것도 싫어? 이제 그만 먹을까? 우리 그럼 이제 씻으러 가자. 으쨔.”
든든한 옆지기는 나와 확실히 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와 옆지기가 벌인 치열한 전투 현장을 꼼꼼히 치우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내가 들어갈 여유는 없었다.
지아는 씻고 나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엉거주춤 걸어와서 내 다리를 꼭 안고 나를 쳐다봤다. 이쁘고 사랑스러웠다. 이쁜 짓을 해야 만족하고 이뻐해 줄 수 있는 내 모습이 갑자기 싫었다.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우리 공주님 어디 가볼까? 저기 가볼까? 엄마랑 아빠랑 지아 사진 있지요? … 요기에 나오는 그림처럼 나중에 엄마 아빠가 지아 손잡고 슝 올려줄게.”
그녀도 좀 잡을 수 없지만, 그녀의 아버지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