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도 크고 높은 조형물 아래로 차가 드나들 수 있게 만든 정문이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엔,조형물 아래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레일과 묵직한 접이식 철문도 있었다.
정문 근무자가 철문을 레일 위로 힘 있게 밀고 당기고 해서, 우리 학교의 정문은 열렸다 닫혔다 했고,차량이 도로 위 레일을 가로질러 정문을 통과할 때마다, 철커덕-탁! 하는 바퀴 부딪히는 소리가 주변까지 들렸다.
내 기억으로 철문은 밤 12시경 닫히고 새벽 5시쯤 열렸던 것 같다.
정문은 민주화 투쟁 시절에는 시위학생들과 전투경찰이 대치하는 경계선으로 사용되었고, 학업활동에 방해되는 외부세력 진입 시에는 그들을 저지하는 보호 장벽으로 쓰이기도 했다.
정문은 지켜야 할 것이 참 많은 우리 대학의 출입구였다.
하루는 선배 한분과 예기치 않은 밥자리를 같이하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출퇴근 시간은 어떤 시간을 기준으로 하느냐' 물어보게 되었다.
나를 한번 힐끗 본 선배는 출퇴근 시간은 말이야....
'정문에, 차량 앞바퀴가 탁 걸리는 시간이 9시 출근시간, 뒷바퀴가 탁 걸리는 시간이 6시 퇴근시간이야'하고 답하였다.
아무래도 경리과 근무해서 그런가? 선배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정말 정확하고 날카롭게 출퇴근 시간을 정의하고 있었다.
꼭 퇴근시간을 앞두고 불러서, 이일 저일 업무지시를 하시던 과장님이 한 분 계셨다.
우리가 대학에는 없는 전무라는 직책을 붙여 ㅇ전무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그분은, '점심시간은 오전일을 마치고 오후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강조하셨다. 물론, 그분의 출근시간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오늘 할 일 준비를 마친 시간이며, 최소한 업무 시작 30분 전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정리해보면 사무실에 8시 30분까지 출근하라는 얘기가 되고, 퇴근은 업무지시를 마무리하고 나가라는 뜻이 분명하니 퇴근시간은 없다고 봐야 한다.
명확하게 8시 30분 출근해라 한적 없고, 밤늦게까지 근무해라는 얘기도 하지는 않았으나,
이건 엄연히 근로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가 그런 법을 생각해본 기억은 없다.
군대 시절 바로 윗 고참과 제대 말년의 최고 고참 사이에서,
'야 너 누구랑 오래 근무할 것 같아!'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었다.
긴 세월 같이할 경리과 선배의 정문 철커덕 시간을 따를 것인가?
우리 과에서 가장 높은 전무님의 정한 바 없는 시간을 따를 것인가?
노선을 정해야 할 시점에, 나는 두 갈래 길의 앞날을 상상해 보았다.
선배를 따른다면 나는,
칼퇴와 함께하는 가족과의 저녁이 있는 삶과 더불어, 아침 운동으로 건강도 잘 지킬 것이다.
근무평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테니, 제 때에 승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중에 퇴직할 때, 좋은 직장에서 한 세월 잘 보낸 훤한 얼굴을 하고 정문을 나설 것이다.
전무님의 말을 따른다면 나는,
제때제때 승진해서 과장실을 빠르게 차지하지만, ㅇ전무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침 일찍 사무실에 들어와 밤늦은 줄 모르고 일을 하면서, 일하는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퇴직할 때는 나이 든 휑한 얼굴을 티 안 내려고, 여전히 사무실 안에 있는 것처럼 후배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끊임없이 내뱉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