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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욱 Oct 02. 2020

꽃보다 아름다운 애기단풍(1)

(백양사 1 ~ 3)

1. 유래    

 대청의 정수리를 불 지른 단풍이 하루에도 수십 킬로미터 화염으로 남하할 때 세상은 온통 뜨겁게 달구어진다. 신문도 TV도 인터넷도 연일 단풍 명소 찾아 소개하기 분주하고, 고속도로는 주말 이침부터 붐벼 아우성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들뜨는 사람들. 이때가 되면 나의 발길은 시절을 감지한 철새처럼 백양사로 날아간다.

 옛날 어느 고승이 설법을 할 때 흰양 한 마리가 나타나 사흘 동안 설법을 듣고 해탈하였다는 절 백양사. 내가 이 절을 처음 발견한 때가 언제였던가. 대학교 2학년 -신록처럼 푸르던 시절-. 과 부대표의 주동으로 우린 백양사에서 내장사로 이어진 등산을 계획했다. 기차를 타고 백양사역에 내려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여학생들의 재잘대는 웃음처럼 팡팡 튀는 걸음으로 울창한 신록의 계곡을 따라 들어왔을 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연못 위에 우뚝한 쌍계루였다. ‘한국의 산하’를 소개하는 책자 가을 편이 있다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쌍계루.  백양사는 이미 그 때부터 첫사랑의 감동처럼 가슴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환상으로 자리잡았는지도 모른다.   

 4월 고불매의 고아한 향기를 시작으로, 5월 애기 단풍 연두빛 새순과 산벚꽃, 그리고 쌍계루 연지를 하얗게 수놓는 이팝니무꽃, 8월 내내 아프도록 피고지는 붉은 배롱나무꽃, 9월이면 핏빛 왕관을 터뜨리며 지천으로 깔리는 상사화, 10월이면 파란 하늘에 주황빛 연등을 어지럽도록 매달고 있는 감나무, 11월이면 온 세상을 들떠 아우성치게 하는 눈부신 애기단풍. 그리고 겨울이면 더욱 청청해지는 비자나무 숲. 언제 어느 때나 꽃과 나무로 새로와지는 절 백양사는 절기가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세시풍속 날 지극히 한국적인 여인이 차려입은 나들이옷처럼 놀랍고 눈부시다.    


2. 가는 길    

 백양사 I.C를 나가 작은 읍내을 지나면 명산과 뭇 산의 경계는 분명해진다. 눈부시게 푸른 수면에 비치는 단풍들의 반영. 굽이굽이 장성호를 끼고 도는 백양사 가는 길은 그야말로 단풍으로 치장한 레드카펫이다. 소슬한 바람결에 뒹구는 숱한 단풍잎과 원색의 속살 드러내며 투명하게 채색된 단풍 가로수들. 그리고 장성호를 에워싼 단풍 능선들. . 특히 붉은 석양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며 긴 아쉬움의 드레스를 하늘과 수면 위에 단풍빛으로 펼쳐놓으면, 차를 멈추고 늘어선 사람들도 ‘와!’ 외마디 감탄사를 쏟으며 온통 붉게 물들어 단풍이 된다.

 스쳐지나는 상점들도 노란색이다. 바닥에도 진열대에도 시렁 위에도 천정에도 누이고 쌓이고 매달린 감들이 지천인데. 이 감들을 깎아 말린 곶감 역시 전국 최고의 맛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서암스님은 1900년대 이르러 폐허가 된 백양사를 신도들의 시주에 의지하기보다는 절에서 짓는 농사와 스님들의 울력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고, 지금의 고불총림으로  일구어 냈다고 한다. 그때 사찰 재정에 큰 도움이 된 것이 백양사 감이라고 한다.

 장성호를 지나, 단풍 가득한 학교가 인상적인 작은 마을을 지난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흘러내린 능선은 부드러우나 깊이를 알 수 없는 골짝으로 뻗은 길. 바야흐로 백양사 가는 길이다. 수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애기단풍들이 터널을 이룬다. 애기 손바닥처럼 작고 곱고 연하여 이름 붙은 애기단풍. 형형색색으로 물든 애기단풍들이 산에도 들에도 계곡에도 길에도 길바닥에도... 빛의 잔치 색깔들의 축제 들뜸과 환희의 절정이다.     


3. 연지    

 ‘고불총림백양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청청한 노송과 진다홍 애기단풍이 도열한 사이로 깔끔한 아스팔트길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데.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청초한 상사화 난잎들이 살에 닿은 듯 싱그럽고, 우측으로 고개를 틀면 다급한 경사면에 꽉 들어찬 단풍 숲.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사람들에 밀려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멈춰 돌아보고 다시 앞을 바라보면 ‘아, 세상에나 어찌 저런 풍경이... 어쩜 저런 색깔이...’ 

 주차장이 끝난 좌측 언덕 아래 이름도 고운 ‘가인야영장’이 있다. 급격히 일어난 오토캠핑의 분위기를 타고 야영장은 이미 만원이다. 7,80년대  낭만의 캠핑 문화가 다시 도래했다. 도시에서 탈출하는 현대인들이 고급 펜션과 콘도를 버리고 캠핑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최고급으로 장비를 갖추려면 중형차 구입 가격에 맞먹는다는 엄청난 자본과 편리함을 장착하고 자연의 품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가인 야영장’ 초입에 작은 연지가 있다. 우측 언덕 위 백양사 진입로의 들뜬 아우성과 야영객들이 뿜어내는 고기 냄새 술 냄새의 왁자함을 껴안고도 소박하고 청초한 가인 연지. 눈에 띄게 크거나 깔끔하게 정돈되지 않아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비껴 있어 그 고요함이 더욱 깊다. 특히 바람이 일기 전 아침 연지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주홍비단을 두른 앞산과 뒷산. 낙락 노송의 기품어린 줄기, 그리고 생기 있게 웃음 짓는 애기단풍과 바람빛으로 말라가는 노화의 쓸쓸함까지. 연못가 반석 위에 앉아 동동주잔 가득 흰구름 띄우고 수면을 타고 오는 바람에 살 닿으며 종일을 흥얼거려도 싫지 않을 풍경이다. 

 백양사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연지가 셋이나 있는데, 또 하나는 부도전 앞 연지다. 이 연지의 압권은 단연 백학봉의 반영이다. 백학봉. 백양사의 모든 아름다움과 기품의 근원. 백양사의 모든 조경과 조형의 중심이자 배경. 천년 백학의 신비로움이 깃든 신성한 봉우리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이 부도전 앞 연지는 서암스님이 흉년이 심한 어느 해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이 연지를 파게하고 구휼미를 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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