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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욱 Oct 04. 2020

꽃보다 아름다운 애기단풍(2)

(백양사 4 ~ 6))

4. 갈참나무    

 부도전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는 순간 피안의 세계다. 예전에는 막걸리와 파전 냄새로 탐방객을 취하고 들뜨게 만들었던 술집이 경건한 불경소리 그윽한 찻집으로 변해 있다. 들마루에 앉아 작설 한 모금 머금고 참선하듯 감았던 눈을 뜨면, 노오란 은행잎과 붉은 애기단풍의 흐드러짐이 마치 다시 보고픈 영화 ‘만추’의 배경 화면 같다.

 한참이나 정지했던 시공을 일으켜 다시 절을 향하면, 길은 맑은 계류를 옆에 끼고 산굽이를 돌아간다. 수백년 된 갈참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뻗어 허공을 찌르고, 높이를 초월한 단풍나무가 파아란 가을하늘에 오색기로 어지럽다. 좌측을 바라보면 계곡 가득 자그마한 나무들이 노오랗고 빨간 입을 벌려 재잘거리고, 우측을 돌아보면 청청한 비자나무 사이사이로 치장한 애기단풍들의 숨박꼭질이 한창이다. 서늘하리만치 짙은 녹색의 비자나무잎과 원색으로 상기된 단풍잎이 빚어내는 색체의 대조법. 백양사 단풍의 최고조을 이루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기영이형과 나는 백양사 기행을 하면 항상 전날 도착하여 어둠에 잠든 백양사를 찾는다. 그때마다 늘 다음날의 단풍산행을 위해 술을 참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부처님을 향하던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결국 다시 돌아서게 만드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어둠을 가득 메운 단풍의 향기. 삶의 기쁨과 슬픔과 환희와 절망이 발효하는 듯 그윽하고 아득한  낙엽 내음새. 가슴을 온통 미어지게 하는, 아! 진하디 진한 가을 산의 체취에 우리의 의지도 떨어진 낙엽이 되고, 단풍막걸리에 단풍두부 안주를 사러 다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밤에, 크기와 높이를 초월한 5백년 된 갈참나무 앞에 서면 모골이 선득하고, 가슴이 서늘하다. 사천왕을 우러러 보듯 두렵고 신성한 위엄에 압도당한다. 또한 가로등 조명을 받은 애기단풍을 올려다 보면, 잔가지에 열린 무수한 애기 별들. 고개가 부러질 만큼 올려다 보고 다시 올려다 보아도 눈은 지칠 줄 모른다. 어찌 이곳을 맨 정신으로 지날 수 있단 말인가. 밤이건 낮이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길. 하여 우리는 이 길에 주저앉아 술 한잔 안 따를 수 없고 단풍으로 젖어들지 않을 수 없다. 어둠에 잠긴 취기와 감동의 황홀한 낙엽 길. 그 정점에 쌍계루가 있다.    


5. 쌍계루    

 쌍계루. 한국의 명승을 소개하는 책자가 있다면 당연히 표지 면을 장식하는 승경. 특히  가을 쌍계루는 정자가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의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다. 백암산에서 흘러내리는 양단수를 막아 연지를 만들고 그 청류를 굽어보는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백학봉의 흰 날개를 머리에 이고, 오색의 애기단풍 만다라가 광배로 찬란하다. 양쪽 겨드랑이에는 아치형의 석계가 사바 중생들을 불세계로 인도한다. 특히나 흐르는 계류를 징검다리로 막아 만든 쌍계루 앞 연지는 인공인 듯 자연인 듯 너무나 맑고 투명하여 눈이 시리다. 백양사 누각들과 연지를 에워싼 단풍나무와 절정으로 불타는 산들의 반영. 이절의 어느 고승은 입산한 후 평생을 여기서만 지냈다고 한다. 일체 유심조(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를  깨우친 스님에게 속과 비속의 경계는 이미 사라져 버린 탓도 있겠지만 이 절은 평생을 바라보아도 지치지 않은 만큼 시절 변화가 환상적이다.

 기영이형은 비갠 어느 여름날 아침 쌍계루 난간에 기대어, 그림자처럼 연지 징검다리는 건너는 비구니스님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반영을 본 후로, 해마다 여름이 되면 비현실적인 그 추억에 이끌려 이 절을 찾는다고 한다. 쌍계루 난간에 앉아 바라보는 반영도 아름답지만, 청류 흘러넘치는 연지 징검다리에서 바라보는 반영 또한 기가 막히다. 하여 이곳은 계절 내내, 백학봉을 머리에 이고 성장한 여인처럼 서 있는 쌍계루 고운 자태를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람들로 넘치고 정체된다. 그래서 기영형과 나는 인적이 그친 밤에 이 쌍계루 연지 징검다리에 앉아 단풍두부를 안주하여 단풍 막걸리를 마신다. 낙엽향에 취하고 풍경소리에 취하고, 청아한 물소리에 취하고, 어둠 속 자태조차 단아한 쌍계루에 취하고, 그리고 기가 막히게 환상적인 -사랑하는 여인의 눈빛처럼 초롱한- 백학봉의 별빛에 취하여 계곡의 냉기가 심장을 얼릴 때까지 바람과 별빛과 하나가 된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빛나는 것이다. 저기 백학봉에 뜬 별들처럼, 언젠가 지리산에서 보았던 두 시간이 넘게 펼쳐진 -운해와 하늘과 구름이 연출하던- 숨 막히는 일몰의 파노라마처럼, 아 덕유산에서 보았던 여인의 나신보다 순결한 월몰처럼, 애국가에 배경화면으로 깔릴듯하던 동해 청간정의 일출처럼, 어느 해 우연히 이 절에서 친견한 -인간의 몸에서 나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빛의 결정체-, -정신으로만 살아 투명한 영혼이 빙하처럼 응결된- 서옹스님의 사리처럼, 그리고 내 심장을 얼려버린 그대의 눈빛처럼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빛나는 것이다.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것은 죽어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절은 산과 계곡과 계절에 매어 있다

승은 절과 부처에 매어 있다

신도는 승에 매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매어 있다    

대지를 넘어 줄기를 넘어 가지를 넘어 피어난 새순

승을 죽이고 법을 죽이고 부처를 죽여 빛나는 사리

어제를 넘어 오늘을 죽이고 내일을 불태워 나타나는 그대    

코는 종일 냄새 맡은 것의 포로다

눈은 종일 바라본 것의 포로다

귀는 종일 들은 것의 포로다

그리고 나는, 종일 그리는 그대의 포로다    


6. 고불매    

 쌍계루를 내려와 석계를 지나면 본격적인 백양사 경내로 들어선다. 국보 한점 없고 대단한 보물 하나 없는 백양사. 그러나 이 절에는 국보에 버금가는 살아있는 천연기념물이 3점이나 숨쉬고 있다. 우화루 옆 담장에 서 있는 350년 된 고불매. 쌍계루 연못가에서 마주 보고 있는 -고려시대 진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650년 된 이팝나무, 백양사 주위에 자생하는 5천여 그루가 넘는 비자나무 군락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백양사 진입로에 있는 7백년 된 갈참나무. 그리고 백양사 천왕문을 들어서며 만나는 보리수나무. 그리고 대웅전 뒤 8층탑을 에워싸고 있는 배롱나무 등등 보물보다 아름답고 신령스런 나무들이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건축물로서 가장 볼 만한 것은 조선 선조 때 조성된 극락보전과 대웅전인데, 크고 웅장한 대웅전 그 자체가 아름답기보다는 백학봉과의 어우러짐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 역시 백양사의 모든 것은 백학봉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탑은 대웅전 앞에 놓이는데 특이하게도 이 절에는 대웅전 뒤안에 위치해있다. 적멸보궁 같은 경우는 불상이 없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부처님을 대신하므로 건물 뒤안에 사리탑을 모시지만 이 절은 대웅전에 엄연히 불상을 모시고 있다. 아마 대웅전을 머저 세우고 나중에 탑을 세워 탑 속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기 때문인 듯 하다. 아무튼 나는 이 절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적어 한적한 이 공간을 가장 사랑한다. 봄에는 애기단풍의 신록, 여름에는 짙붉은 백일홍, 가을이면 노랗게 열린 감들과 단풍잎이 고요하고 평온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공간의 압권 역시 뭐니뭐니해도 탑과 어우러진 백학봉의 자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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