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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욱 Oct 05. 2020

꽃보다 아름다운 애기단풍(3)

(백양사 7~ 9))

7. 포행 길    

 사천왕문을 다시 나와 절 뒤 골짜기를 향해 오르면 계곡을 옆에 끼고 하늘을 가린 비자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진초록 비자나무와 각양각색의 단풍들이 조화를 이루는 길. 세상의 숲길 중 이만큼 아름답고 고즈넉하고 청량한 길을 찾아내기는 정말 쉽지 않다. 사철 푸른 비자나무 가지가 하늘을 가린 사이로 봄이면 연초록 신록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시원한 녹음이 스스로 맑은 바람을 일으키고 가을이면 숲의 어둠까지 환히 밝히는 단풍으로 눈부시고 겨울이면 순백의 눈꽃이 요정의 나라를 꾸며내는 백양사 비자나무 숲길. 발목을 걷고 냇물을 건너듯 온 몸이 싱싱해진다. 

 맑은 계류를 건너면 길은 우측 산 무릎 밑을 돌아오르고 그곳에서 계곡을 타고 계속 오르면 운문암 가는 길이요. 오른쪽으로 단풍잎이 융단처럼 펼쳐진 가파른 산비탈을 향해 난 돌계단을 타고 오르면 약사암 가는 길이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듯한 너덜겅에 수백년 된 비자나무와 애기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바닥은 온통 붉은 단풍잎으로 뒤덮여 천상으로 이어진 듯 아득하다. 지친 다리를 쉴 겸 바위 위에 앉으면 투명한 바람결에 제 몸을 말리는 가을 숲 향기가 목덜미를 타고 흐른는 땀방울을 씻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감미롭고 향기로운 그늘은 따스한 봄날의 꽃그늘이요 가장 상쾌한 그늘은 바람 산들거리는 가을날의 단풍그늘일 것이다. 긴 생머리가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무릎처럼 싱그럽고 향긋하다.    


8. 약사암과 영천샘    

 절이나 암자를 여행할 때마다 나는 옛사람들의 혜안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들은 어떻게 이리도 기막힌 곳에 절터를 조성하고 암자를 올릴 수 있었을까. 마지막 돌계단에 올라 바라본 약사암은 마치 거대한 바위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처럼 천연의 자연암을 광배로 따뜻하고 단정하다. 특히 마당 끝 까마득한 축대 위에서 내려보는 경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백양사를 에워싼 산자락들이 만개한 단풍으로 물들어 비단을 펼쳐놓은 듯하고 그 비단 폭 속에 백양사의 전각과 연못들이 깨끗하게 수 놓여 있다. 바람은 구름을 몰아오고 눈맛은 오금저리게 아찔하다. 암자의 뒤안에는 높고 깊은 바위 그늘 아래, 어디서 솟아나는지도 모르는 청수가 사각의 거대한 돌그릇 가득 철철 넘친다.

 폐부까지 씻어내리는 물맛의 시원함에 지친다리가 생기를 찾으면, 절의 좌측을 돌아 돌산 골짜기 위로 돌아오르는 돌계단을 만나는데, 그 돌계단은 가파르고 첩첩한 바위산 깊은 골짜기로 파고든다. 그리고 그 바위골의 가장 은밀한 곳이 영천굴이다. 바위 절벽 중간에 생겨난 천연동굴. 그 앞자락엔 절정의 애기단풍이 불어오는 골바람에 가녀린 손바닥을 떨구고, 동굴 위 절벽 위에는 바위 사이에 뿌리내린 청청한 노송이 산수화처럼 가지를 늘이고 있다. 동굴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시원한 약수가 흘러 나온다. 영천샘이다. 옛날 이 굴에는 수도하는 이가 살았는데 항상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손님이 와서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쌀이 더 많이 나오라고 작대기로 쑤셨더니 그 뒤로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왔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심은  순리를 뒤바꾸고 신비를 파헤쳐 부셔버린다. 맞은편 언덕 위에는 ‘탐방객 출입금지’ 푯말이 붙은 작은 별채가 하나 있는데, 가파른 바위뿐인 이 공간에 집를 지은 것도 신비롭거니와, 손바닥만한 마당에 이름 모를 야생화가 가득 피어나 가히 인간세상이 아닌 듯하다.         


9. 백학봉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발길을 위로 향하면 바위 절벽 사이사이 노송과 비자나무와 애기단풍이 신기하게 어우러진 틈으로 길은 끊어질 듯 이어진다. 무협영화에나 나올듯한 절경의 험로를 네발로 기고 손으로 부여잡고 머리를 내리 누르는 바위 언덕 한 굽이를 올라서면, 세상은 망망천지로 탁 트이고 구름은 바람을 타고 몰려드는데, 전면과 좌우가 불현 듯 끊어지고 허공이 발끝에서 넘실거린다. 학의 형상을 띤 백학봉. 여기가 바위 위에 올라 앉은 백학의 발톱 쯤에 해당할까? 아찔한 깊이를 내려다보면 온 천하는 총천연색 비단으로 넘실거리고, 그 한복판에 백양사가 정갈하다. 전후좌우가 모두 단풍의 물결, 단풍의 잔칫날이다. 요만큼에 있는 단풍은 속살 환히 비칠만큼 투명하고, 저기 저만큼의 단풍은 눈을 찌르듯 원색적이다. 

 어지럽도록 아찔한 발길을 겨우 돌려 위를 향하면 길은 다시 바위산 모퉁이를 기어오른다. 좌측은 높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절벽이 막아서고, 우측은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불쑥불쑥 어깨를 들이민다. 그 가파르고 음습한 골짜기에 철계단이 걸려있다. 108개도 넘은 계단은 성지를 향해 오르는 고행의 순례길 같다. 끝없는 계단 끝없는 절벽 사이를 구름이 급하게 타고 넘는다. 너무 가파라 걸음을 옮길 떼마다 계단이 가슴에 턱턱 걸린다. 철사다리 난간을 꼭 부여잡고 한발한발 쉬며 오르며 쉬며 오른다. 드디어 기나긴 계단 끝에 우뚝한 학암. 바야흐로 백학의 부리 끝이다. 

 전우좌우 세상은 거칠 것이 없다. 구름을 몰아오는 바람만이 미친듯이 춤추고, 춤추는 구름 사이로 홀연홀몰하는 까마듯한 아랫세상과 단풍꽃 만개한 앞산 옆산. ‘별유천지 비인간’. 천년 백학이 살고 있다는 선계가 이곳인가? 학봉에 올라 백양사를 내려다보지 않는 자는 백양사를 구경했다고 말하지 마라. 아름다움의 해탈, 감동의 절정. 백양사 기행의 화룡점정이다. 이곳을 처음 올랐던 어느 해 가을 기영형과 나는, 산도 절도 허공도 한눈으로 터지는 이 학봉에 앉아, 막걸리 잔을 구름에 씻으며 저녁 해가 단풍빛으로 물들 때까지 신선처럼 상기되어 일어설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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