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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욱 Oct 08. 2020

꽃보다 아름다운 애기단풍(4)

백양사(9 ~ 12)

10. 운문암 비자나무 길    

 학봉에서 밋밋한 오르막을 약 5분 정도 걸으면 백학봉 정상인데 이곳의 전망은 학봉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정상에서 상왕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작은 단풍나무와 소나무와 여러 잡목들이 어울려 있다. 주말이 되면 백양사에서 내장사로 이어지는 종주산행을 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데, 걷기 좋을 만큼의 능선길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상왕봉 정상에서 우측으로 뻗어나간 길은 내장산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30미터쯤 내려오면 작은 쉼 바위를 만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단풍 능선이 가히 환상적이다. 이 일대에서 가장 깊고 긴 남창계곡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단풍의 물결은 새색시가 정성으로 수놓은 능라 비단을 펼쳐 놓은 듯 화려하면서도 부드럽고 은은하다. 

 이 전망터에서 조금 내려가면 열십자 길이 그려진 고갯마루다. 우측은 몽계폭포를 지나 남창골로 내려가는 길이요 좌측 골짝으로 내려가는 소로가 운문암을 거쳐 다시 백양사로 회귀하는 길이다. 음지 비탈길 가파른 내리막이 푸르고 싱싱한 산죽과 물기 청청한 단풍들로 환하다. 출입금지 팻말이 가로막혀 수도도량으로 이름난 운문암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흙길과 시멘트 포장길이 혼합된 계곡길을 타고 내려간다. 백양사 비자나무 숲길. 봄이면 산벚꽃 꽃송이가 하얗게 날리고, 여름이면 하늘을 가린 신록이 가슴을 서늘하게 씻어내리고, 가을이면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눈부신 산책길. 겨울이면 또 푸른 비자나무 가지가지에 하얀 눈송이들이 새소리에 흩어지는 이 길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숲길 중 하나다. 정말 좋은 절은 이렇게 고요하고도 평온하고 또 깊고 청아한 숲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걷기만하여도 명상과 해탈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만 같다.       


11. 8층 석탑   

  어둠이 두텁게 닫힌 사천왕문을 열고 다시 사찰 안으로 들어가면 은은한 향불 향과 고요한 풍경소리만 밤의 옷자락을 가늘게 흔든다. 불빛 희미한 대웅전 뒤안을 돌아 다시 사리탑 앞에 선다. 밤에 바라보아야 왜 이곳에 탑을 세웠는지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환한 대낮에 쳐다보면 키만 훌쩍하고 왜소하여 8층탑은 조형미가 많이 떨어진다. 그러나 밤에 보면 전혀 다르다.  백학봉의 우측 날개 옆으로 솟은 탑의 자태는 빛나는 별들과 어우러져 한폭의 판화처럼 깊고 묵직하며, 가슴에 손을 모으고 천천히 좌측으로 돌아가면 옆산 공제선 위로 살아 움직이듯 새겨지는 탑신의 자태는 그 조형미가 더없이 완벽하다. 백학봉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룰 수 있는 곳이 대웅전 뒤안인 이곳이고 백양사를 에워싼 봉우리들과 더없이 조화를 이루는 형태가 키 늘신한 8층탑의 형태인 것이다.    


12. 백학의 땅    

 절의 운치는 고요 속에 깃들어 있고, 고요는 어둠 속에 잠겨있다. 어둠에 잠긴 백양사는  고요 속에 그윽하고 성스럽다. 한낮에는 쉽게 느낄 수 없는 경건한 감동이 보이지 않는 이슬처럼 가슴을 깊이 적신다. 명부전 앞에 서서 대웅전을 바라보면 하늘에 새긴 암각화처럼 대웅전을 감싸고 있는 백학봉. 낮에 보았던 약사암과 영천굴과 그 많은 암벽과 단풍들을 검은 옷자락에 감추고 백학봉은 거대한 학이 되어 대웅전을 굽어보고 있다. 또한 대웅전 기둥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면 전면에 펼쳐진 검은 산자락의 자태는 백양사를 향해 날아오는 비상학의 모습 그 자체다. 앞을 보면 거대한 날개를 허공에 펼치고 소리 없이 날아오는 비상학, 뒤를 보면 건장한 어깨와 머리 위에 무수한 별들의 반짝임을 한몸에 안고 천년학의 침묵으로 앉아 있는 백학봉. 밤이 되면 백양사는 학의 땅이다. 학들이 노니는 신선의 세계다. 불국의 세계, 피안의 세계다.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소망의 세계, 다시 태어나도 결코 눈 감을 수 없는 비원의 세계다.      


새를 보았습니까 찬란한 세상 그림자 지우며 젖은 코발트 빛 구름 헤쳐가는 새를 언 땅 끝 쪼아내며 얼마나 비워내기에 하늘을 날 수 있나요 깃털 하나만으로 세상 떠받칠 수 있으면 그리움 풀어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가슴만으로 아프게 살아 근육으로 맺히고 가벼워진 머리 들어 하늘 가리킬 수 있으면 꿈으로나 볼 수 있는 이제 먼 나라로 좀 더 쉽게 날아가게 될까요 움킨 양 손 퇴화시키고 날개로 바꾸어 혹시 내가 날아가도 되나요 가느단 나의 두 다리로는 세상 짓밟을 수 없고 굳세게 매달릴 수도 없어요 목 메우는 울음조차 노래로 뽑아내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대 가지 끝 내려설 수 있다면 최소한의 살점마저 깃털로 말려 달며 기다림으로만 나는 여윌 수 있어요 꽃잎같은 빛깔로 사랑을 수놓으며 어두운 밤 하늘도 소리 없이 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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