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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욱 Oct 18. 2020

구름 위의 산책(1)

부석사 (1 ~ 3)

 1. 일주문 

 

 부석사가 그립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어딘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그와 내가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질이 비슷할 수도 있고, 분위기가 같을 수도 있는, 말 그대로 그가 지닌 영혼의 색깔이 나와 유사한, 같은 부류이기 때문이다. 

 언제였던가? 여름비가 느닷없이 시내버스 차창을 난타하고, 윈도우 브러쉬는 비안개 자욱한, 덜컹이는 코스모스 꽃숲을 헤쳐나갈 때, 문득 그대가 내 의식의 전면에 또렷이 나타나 촉촉한 눈망울로 내 눈을 이윽이 바라보던, 그때가 부석사를 처음 마주한 날이었던가. ‘하필이면 비가...’ 하던 아쉬움이 ‘세상에, 이런 풍광이... ’ 하는 탄성으로 가슴 친 날이 그때였던가

 세찬 소나기의 함성을 웅크린 목덜미로 받아내며 일주문 앞뒤를 우러러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화엄(華嚴)’이었다.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 이른바 ‘대방광불화엄정토’다. 얼마나 화려하고 장엄한 세계이기에 화엄일까? 나 같은 범인(凡人)은 가히 범접할 수도 없는 아름다움의 절정이 화엄일까? 그대 눈동자처럼 애절한 사랑의 절대미가 바로 화엄일까? 영혼과 영혼의 하나됨, 그리움과 그리움의 하나됨의 경지가 화엄일까    


2. 은행나무 길   

 

 산을 오른다는 것, 언덕을 오른다는 것, 높다란 대(臺)를 오른다는 것. 오른다는 것은 천상(天上)과의 조우(遭遇)다. 높이를 더해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육신과 점점 가벼워지는 정신. 그 둘의 함수관계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성취감. 한발 한발 부석사 은행나무 길을 오르다 보면 속(俗)과 비속이 어우러지는 절묘한 희열이 은행잎을 조명(照明)하는 햇살처럼 맑다.

 현대화의 폭우를 퍼부으며 사람들은 눈 맑은 산하를 무참히 학살하고, 숨 쉬는 동식물의 터전 위에 높고 크고 편리한 무생명의 건축을 쌓아 올렸다. 정신의 안락이 아닌 육신의 안락, 자본의 궁전, 닭장 같은 콘크리트 더미에 평생의 꿈을 걸고, 화폐의 가치가 인간을 저울질하고, 졸부들의 허리는 철근보다 뻣뻣하고. 자연을 파헤치는 굴삭기의 소음이 사람의 귀를 찢는다.

 그들이 좀 더 여유와 풍요를 찾으면 자연으로 눈을 돌린다. 불행히도 자본의 자연, 돈의 자본이다. 이기적인 자연, 계산적인 자연에 눈을 뜬다. 설악산 바위을 훔쳐 수십억원짜리 축대로 세워놓고, 뱀사골 소나무를 정원수로 치장하고, 꾀꼬리의 자유마저 거실에 감금시킨다. 우리 모두의 자연을 나만의 것, 내 것으로 만든다.

 이제 가진 자는 세상과 자연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가지지 못한 자는 인간 세상에도 자연에도 발붙일 곳 없다. 허가 없이는 산에도 강에도 들지 못하고 풀뿌리하나 캐 먹을 수 없다. 세속이 싫어 자연을 찾아 은거하던 선조들의 풍류와 청렴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백이와 숙제도 추방당한 땅, 서경덕도 이달도 발붙일 수 없는 우리의 산하.     


3. 부석사 석축    

 그러나 부석사 석축 위에 서면 그들이 절대 가져가지 못할 최고의 정원 장식물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이 지닌 최고의 아름다움. 그 정수를 모두 지닌 장엄한 존재. 그것은 바로 능선이다. 산의 능선, 산들의 능선, 저 장엄한 산맥들의 능선, 부석사에 오르면 아스라이 펼쳐진 소백산맥의 장엄한 능선을 가슴 서늘하게 만날 수 있다. 능선은 자신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구름과 하늘의 조화를 통하여 수시로 그 모습을 바꾼다. 하늘빛과 구름의 형상에 따라 무한 변신하며, 스스로의 굴레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잉태하는 것이다. 설레는 가슴을 다독이며 나는 지금 이들을 만나러 왔다.

 서구 미인의 웃음처럼 늘씬하고 시원한 당간지주 지나면, 성벽처럼 웅장한 석계와 석축을 만난다. 석조물의 대칭미, 불세계를 향한 가파른 돌계단을 근엄하고 장쾌하게 석축이 호위한다. 이 백팔개의 계단을 딛고 아홉 개의 석축을 넘어서면 바야흐로 아미타 극락에 이르는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조화의 극치와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석사에 오를 때는 잡념하지 말자, 쓸데없는 지식을 떠올리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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