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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욱 Oct 22. 2020

구름 위의 산책(5)

부석사(11 ~ 13)

11. 3층 석탑    


 무량수전을 돌아 나오면 무량수전 동쪽에 단아한 3층 석탑이 있다. 상처를 입었으나 균형 잡힌 몸매, 무량수전 동쪽에 비껴 있어 소외된듯하지만, 좁은 마당과 동쪽을 향한 아미타불의 배치를 고려할 때 이 절의 중심 불탑임이 분명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량수전에 가장 적절한 규모로, 당당하고 굳건하면서도 겸허의 미덕까지 지닌 통일신라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석탑 위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무량수전과 안양루 그리고 아스라이 펼쳐지는 산맥들의 조망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자 사진 기자들이 즐겨 찾는 포토죤이기도 하다. 

 그 석탑을 뒤로하고 올라가는 길은 넓지 않은 돌길이고 나무가 지붕을 만들어 여름날의 시원함과 가을날의 청아함 그리고 겨울날의 스산함을 느끼게 한다. 숲 사이로 난 돌길은 산사의 화려한 공간을 넘어 은둔으로 향하는 길, 이런 길의 끝에는 언제나 고요함의 건물이 닿아 있다.   

 

12. 조사당    


 국보 제 19호 조사당. 맞배지붕의 단아함, 작으나 엄숙하고 고요하나 무게 있는 공간, 앞에서 보면 일직선의 지붕선이 곧고 바른 여법의 세계를 말하는 것 같고, 발길을 돌려 옆면을 향하면 넉넉한 추녀선과 단정한 바람벽, 도리와 들보 등 각 부재(部材)들이 삼각으로 그려내는 벽면의 무늬선이 너무도 조화롭고 정갈하여 숨이 멎는다. 단아함 속에 깃든 범접하기 두려운 기품의 무게. 기품 있는 사람. 기품 있는 인격.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품격의 경지가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조사당 처마 밑 봉당 위에는 선비화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의상 대사에 얽힌 지팡이 전설이 의아함을 주지만, 실재로 이 나무는 높이가 170cm도 안되고 굵기가 5cm도 안 되지만 수령은 500년을 넘었다고 한다. 아무튼 어쩌랴. 종교는 과학을 떠나 영감과 찬미의 눈으로 보아야 보이는 것임을, 세상만물도 분석보다는 영감으로 대해야 하는 것임을.     


13. 저녁 예불    


 날이 저문다. 저물어가는 산사. 저물어 가는 소백의 능선들. 내 삶도 저렇게 저물어가야 하리. 피부에 스미는 고적감, 쓸쓸함 속에 스미는 평온함, 먼 길 떠나는 나그네처럼 가진 것 다 내려놓고 바람에 실려 떠나는 퇴색한 낙엽 한 장. 내 삶도 말없이 저렇게 스러져 가야하리.

 소백산 자락을 기어 내려온 어둠이 봉황산 기슭에 묵언으로 깃들면, 천년 수도 조사전 뜰에는 별빛만 가득하고, 취현암 마당귀를 돌며 삼매에 빠진 노스님의 그림자가 허공에 뜬 달처럼 허허롭다. 허공에 뜬 달, 허공에 뜬 산사, 허공에 뜬 발걸음, 허공에 뜬 향기, 그리고 허공에 뜬 가슴, 허공에 뜬다는 것은 존재의 극락을 떠다니는 일. 아! 그대를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이 허공에 떠올라 꽃잎처럼 눈송이처럼 구름처럼 둥둥거리던 시절도 있었건만...... 

 허공에 뜬 어둠과 고요를 디디며 낙화처럼 무량수전에 내리면, 바야흐로 시야의 세상은 사라지고 소리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귀가 열리는 시간이다. 귀로 바라보는 세상이다. 눈은 스러지고 귀가 살아나 모든 사물의 형상과 움직임을 음표처럼 적어나가는 시간이다. 소리가 그려나가는 스케치를 따라 상상과 기억의 화필들이 마음껏 재주부리며 화폭을 채워나가는, 나만의 색감과 모양새로 세상을 다시 그리는 시간이다.

 그림자만 흐르는 도량석에 이어 어둠의 소맷귀를 슬쩍 당기는 종송이 끝나면 바야흐로 사물(四物)이 울린다. 길짐승을 교화하는 법고소리,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천도한다는 운판소리, 물 속 짐승들에게 불법을 일러주는 목어소리, 미망의 어둠을 헤매는 팔만 사천 사바 중생을 제도한다는 범종소리. 그리고 스스로의 가슴을 깨쳐내는 목탁소리...... 처마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처럼 울리는 공명의 목탁소리. 해탈의 염원 불경소리. 불가해의 미소를 지으며 중생을 제도하시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찬불 소리. 너무도 깊고 간절하게 이상세계를 부르는 염불 소리. 목어처럼 목탁처럼 물고기처럼 한순간도 눈 감을 수 없는 나의 영혼. 나의 염원. 아, 혼신으로 불러보는 나의 사랑아!     


천만 겁

인연의 강을 건너

당신 곁에 왔습니다.    

부석사 법고 울릴 때

석탑 돌아 합장하고

안양루 난간 위에 마주보고 섰습니다.    

날 저무는 마음 가득히 

범종 소리 은은하고

퍼득이던 바람도 

단아한 목어 소리에 숨을 고르면    

향불 지핀 경건함이

촛불 켜고 청수 길어 올리는

대방광불화엄정토    

아득한 어둠이 골짝 가득 밀려들어

청아한 독경마저 

별빛에 스러져 가면    

아! 세상은 오직

달빛처럼 만개하는 당신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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