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진욱 Nov 09. 2020

매향으로 장엄한 극락세계(1)

선암사(1~3)

 1. 그리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인 김영랑의 한 해는 모란이 핀 때와 모란이 피지 않은 때 오직 둘만으로 나뉘듯, 나의 한해를 둘로 나눈다면 매화가 핀 시절과 매화를 기다리는 시절 둘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온 세상을 환희로 들썩이던 단풍 축제가 지나고, 쓸쓸한 바람만이 낙엽 길에 뒹굴고 서러운 서릿발이 한발 두발 돋아 서는 겨울이 오면, 내 가슴 밑바닥에 뿌리내린 매화 가지가 천년 세월의 등걸과 가지를 허공에 세우고 그리움의 꽃봉오리를 매달기 시작한다. 결국 쓸쓸함의 계절 12월과 외로움의 계절 1월 내내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눈을 감으나 뜨나 환상적으로 피어나는 단아한 매화의 자태와 알싸한 매화향의 환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 짧은 시간과 사랑하는 사람을 아픔으로 기다려야하는 긴 시간. 기다림의 실체는 그리움이고, 그리움의 실체는 아픔이고, 아픔의 본질은 사랑이다. 하여 계절이 춥고 외로울수록 그리움의 꽃봉오리는 눈 맞는 사리탑처럼 고고하고 애절하다    


2. 진일기사식당    


 육지에서 매화가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곳, 절 전체가 매화로 조경되어 온통 매화향으로 가득 차는 곳이 금둔사요, 수백년 된 고매(古梅)의 기품이 담장을 따라 즐비한 곳, 누구나 흐드러진 매화의 꽃 잔치에 넋을 잃는 곳은 선암사다, 

 승주 I.C를 빠져나가 아름드리 벚나무가 눈부시게 하얀 꽃송이를 구름처럼 피우고 있는 초등학교를 지나고, 상점 몇이 고개를 내밀어 여행객들을 기웃거리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꺾으면, 따스한 산자락 밑에 넓은 주차장을 지닌 식당이 나온다. ‘진일 기사식당’이다. 이곳을 지나는 여행객들은 아마 대부분 이곳에서 맛의 허기를 해결할 것이다. 이집의 메뉴는 백반 하나다. 그러나 20가지에 가까운 반찬에 돼지고기와 두부를 묵은지와 함께 끓인 김치찌개는 맛이 가히 일품이다. 눈을 즐기는 여행에서 입의 즐거움까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가!    


3. 보춘화    


 식당을 지난 길은 우측 산굽이를 타고 끝없이 돌아 나가는데, 작은 산전과 집들이 양지바른 산자락에 삼삼오오 둘러 앉아 소곤거리고, 길 좌측 아래로는 제법 너른 계곡이 여윈 논배미들의 목을 축여준다. 산과 마을과 논밭과 계곡의 정겨운 조화에 흐뭇한 미소 흘리다보면 상상 외로 맑고 큰 저수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 저수지 발치에서 직진하면 선암사 가는 길이요. 좌측으로 산굽이를 계속 돌아 오르면 금둔사 가는 길이다. 나는 언제나 선암사 보다 금둔사를 먼저 들른다. 금둔사의 매화가 선암사 보다 일찍 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찰의 규모나 아름다움 그리고 매화의 기품, 그 모든 것의 절정은 역시 선암사에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수지를 끼고 고개 하나를 넘고 논밭과 마을을 끼고 또 한 고개를 넘으면 바야흐로 금둔사에 닿는데, 이 길의 야산에는 야생난이 지천이다. 어느 해 3월 나는 성호고 3학년을 함께 했던 선생님들과 매화기행을 온 적이 있었는데, 구부러진 산길을 열심히 운전하던 이헌태 선생이 

 “저기 난꽃 폈네”

 “말도 안되는 소리, 난도 안 보이는데 그 작은 꽃이 보이냐”

했더니 저만치 앞에 차를 세우고 되돌아가서 정말 난꽃을 꺾어온 것이다.  자주색 대궁에 핀 초록색의 난꽃은 그지없이 깨끗하고 싱싱한 자태에 청초하고 그윽하고 상쾌한 향기를 한껏 내뿜고 있었다. 충격적인 감동이었다. 한 분야에 심취한 자의 능력이란 이런 것인가! 70키로가 넘는 속도로 구부러진 산길을 운전하며 그 작은 난꽃을 찾아내다니...

 내친 김에 우린 고갯마루에 차를 세우고 아예 난꽃을 찾아보기로 했다. 퇴색되었지만 아직은 겨울의 회색자락이 역력히 남아있는 산자락 양지바른 곳을 자세히 살피니 놀랍게도 야생난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자주색 대궁에 녹색 꽃잎, 설판에 붉은 점이 있는 것을 보춘화라고 하는데, 이 보춘화의 변이종들 - 꽃의 색깔이 다르거나,  잎이 녹색에서 벗어나거나 무늬가 들어 있거나 짧은 잎을 가진 난 - 을 찾아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소풍하듯 양지바른 야산을 뒤졌고 약 30분 뒤에는 누구나 청초하고 싱싱하고 향기 그윽한 보춘화 한두 송이를 꺾어가지고 내려올 수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구름 위의 산책(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