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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진욱 Feb 06. 2021

오래된 껍질

기온 영하 13℃, 풍속은 북서풍 4㎧

그야말로 겨울의 한복판이다.

그래도 아파트 창살이 갑갑해서 뒷산에 오른다.

   

겨울의 사물들은 적나라해서 좋다.

꽃으로 녹음으로 단풍으로 치장했던 나무들이

나신으로 떨며 서 있는 모습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가진 자들의 야차 같은 거짓과는 다른

추위 앞에 솔직한 자연의 모습이 돋보인다.   

 

숲은 가지가지의 나무들이 각자각색의 모습으로

태어나 자라고 죽어간다.

줄기를 보면 현재 삶의 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껍질을 보면 살아온 삶의 나이를 알 수 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린 가지들은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반면

오래된 나무들은 쩍쩍 갈라진 각질의 골이 깊고 거칠다.

멀리서보면 늙은 아버지의 팔뚝 같고 가까이 보면 삶에 지친 어머니의 이마 같다.  


바람의 길인가? 세월의 흔적인가?

(바람과 세월은 제 스스로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지만

대상을 통하여 존재를 드러내는 공통점이 있다.)

나무마다 바람의 파도(풍파)가 새겨놓은 무늬가 자못 아름답다.

사막의 모래 사구처럼, 물살 차르르 산정호수처럼

바람의 자취에는 생명의 율동이 있고

오래된 껍질들은 그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주름으로 담고 있다.


지구상에서 포유류 중 가장 오래 산다는 거북이는

무늬지고 딱딱한 등껍질을 짊어지고 사는데

상고시대 중국 사람들은 이 거북의 등껍질로 

자연의 변화와 국가의 중요한 길흉화복을 점 쳤다고 한다.   

 

어찌 거북뿐이겠는가? 오래된 생명들은 모두가 껍질에

삶의 풍파를 무늬로 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늙으신 우리 부모님도 저 거친 주름 속에

살아온 자취와 깨달음을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 무늬가 바로 우리가 진정 읽어내야 할 문자인지도 모른다.  

      

이젠, 홀로 거동조차 버거워 하루 대부분을 침대에서 

고목처럼 굳어 계신 아버지의 주름진 살갗에

그 주름 행간 하나하나에 내가 가야할

생의 목적과 의미가 비기처럼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마르고 거칠고 파이고 갈라진 껍질이야말로

금이 가고 깨어져도 혼신으로 내부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야말로

인생이라고 하는 이 무상한 놈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는 

가까이 있는, 유일한 열쇠인지도 모른다, 

바람과 세월이 그려 놓은 보물지도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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