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반성문을 영어로 하면 '글로벌'이라는 아재 개그가 있다. 30년도 더 전에 글로벌 시대를 영도한 이를 전방의 군대에서 만났다. 당시 30대 중반의 노총각이던 포대장은 외모만큼 성격이 더러웠다. 항간에 떠도는 일설에 의하면 여자에게 차일 때마다 병사들에게 분풀이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데이트를 했을 주말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특히 몸을 사렸다.
포대장은 우리를 3단계로 괴롭혔다. 1단계는 무지막지한 폭행이다. 특히 '대가리 박아'를 시켜 놓은 상태에서 배를 걷어차는 것이 주특기였다. 2단계는 모욕주기였다. 병사를 꿇어 앉혀 놓고는 부대에서 키우던 개를 데려와 그 앞에서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을 해댔다. 그 말을 들으며 개와 눈이 마주치면 정말 개가 더 훌륭해 보였다. 3단계는 글로벌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2,000자 반성문을 쓰게 했는데, 검은색 볼펜으로 쓰다가 5의 배수가 되는 글자는 빨간색으로 적게 했다. 하나라도 틀리거나 내용이 부실하면 반성문은 두 배씩 늘었다. 사탄도 치를 떨 사악한 놈이었다.
어느 겨울 동계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우리가 진지를 구축하려던 곳에 다른 부대가 막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 차량이 지나가다 다른 부대의 안테나를 부러뜨렸다. 그쪽 부대의 상관(아마도 소령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의 호출로 무전병이던 내가 불려 갔다. 내가 가진 안테나를 달라는 것이었다. 안테나는 보급이 부족하여 귀한 물건이었다. 내 잘못도 아닌데 내 안테나를 뺏기게 되어 억울한 마음에 혼잣말로 욕을 했다. 그런데 소령이 그걸 듣고는 대뜸 나를 걷어찼다.
"너 뭐라고 했어?" (꼭 욕을 들으면 사람들은 되묻는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개새끼라고 했잖아!" (들었는데 왜 묻는 거지?)
나의 반항기 어린 눈을 보고는 그가 갑자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들어 내 머리통을 겨누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 현실로 구현될 줄은 몰랐다. 빈 총이려니 생각하면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훈련도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넌 총살감이야, 인마! 손들고 꿇어앉아 있어, 새꺄!"
안 그래도 겨울바람이 매서운 들판에서 벌을 서고 있으려니 몸과 마음이 시렸다. 철수하는 상대 부대와 진지를 구축하는 우리 부대의 숱한 병사들이 비웃듯 쳐다보며 지나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꿇어앉아 손들고 있는 벌은 끝인 줄 알았다. 너무 쪽팔려서 탈영을 하고 싶었다. 집보다는 북한 땅이 더 가까웠다. 이래서 월북을 하는 걸까. 아무튼 우리 사악한 포대장이 싹싹 빌고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풀려났다.
포대장의 본격적인 갈굼은 부대로 복귀 후 시작되었다. 포대장실로 불려 갔다. 1단계로 배를 걷어 차이고, 2단계로 개 앞에서 욕도 들었다. 드디어 3단계 글로벌 차례였다. 2,000자가 아닌 5,000자를 다음날 아침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밤새 검은색 볼펜과 빨간색 볼펜을 번갈아 가며 반성문을 적었다. 정말 북한으로 가 수령님의 품에 안기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