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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론산바몬드 Jan 04. 2023

나, 국내산이라구욧!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어느 해 여름, 기차 시간이 남아 서울역 인근 롯데마트를 기웃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당시 나는 흰색 반팔 티셔츠에 검은 백팩을 메고 있었다. 전자제품 코너에서 물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점원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May I help you?"

"....."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가 다시 천천히 말했다.

"Do you need any help?"

"I'm Korean!"

"아, 죄송합니다."


그는 얼굴이 벌게져 저만치 물러섰다. 분명 나를 동남아 사람쯤으로 보았을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 소리치는 나를 상상했다. '여기 책임자 나오라고 해!'


가끔 지인들로부터 동남아 사람 같다는 얘기를 듣는다. 아내도 내가 동남아에서 슬리퍼 신고 웃통 벗고 다니면 원주민과 구분하기 어려울 거라 놀리곤 했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쌍꺼풀 진한 눈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봐도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게 내 결론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6년 전 분식집에서 라면과 김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외국인 여자가 가게로 들어섰다. 캄보디아나 태국에서 온 것이 분명한 외모였다. 그녀는 사진이 곁들여진 메뉴판을 한동안 쳐다보며 좀체 음식을 결정하지 못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설명을 덧붙였지만 한국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남아 사람들은 멸치 육수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나중에 주인에게서 들었다. 그래서 국수 같은 건 빼고 가급적 김밥이나 라면을 권한다고 했다. 무엇을 고를지 궁금하여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메뉴판 앞에서 갈등하던 동남아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사뭇 놀란 표정이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5초 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 거기에 담긴 의미를 나는 간파해 버렸다. '나와 같은 곳에서 오신 분 같은데 이럴 때 좀 도와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라면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마침내 동남아 사람에게 외모를 인증받고야 말았다는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혹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는지 부모님께 물어볼까 그냥 묻어두고 갈까 고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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