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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론산바몬드 Jan 15. 2023

명사를 잊은 그녀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사무실에서 오십 대 장학사 두 분이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가운데 앉은 나는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는데,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두 분은 잘도 주고받았다.


"그거 어떻게 됐어요?

"네, 뭐요?"

"그거 있잖아요, 부서졌다더니?"

"아, 그거요? 이젠 괜찮아요. 그냥 놔두려고요."


그게 뭔지 아직도 모른다. 이상하게 오십을 넘어서면 대개 명사는 휘발되어 버리고 대명사를 많이 쓰게 된다. 불현듯 메타인지를 가동해 보면 나도 그 대열에 들어선 지 오래다. 인지상정인가 싶다가도 이게 나이 든다는 건가 싶어 가슴이 오그라든다.


분명 잘 알고 있는 단어 또는 이름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답답한 마음에 검색을 해보려 해도 입력할 키워드가 마뜩잖다. 별 수 없이 대명사를 써야 한다. 문제는 이게 점점 심화되고 마침내 언어 습관이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60을 바라보는 장학사님과 같이 식사를 했다. TV 시청을 좋아하는 그분의 특성상 드라마 얘기가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가 먼저 물었다.


"요새 그거 봅니까?"

"뭐요? 또 재밌는 거 있나 보네요."

"지금 인기 많은 거 그거 있잖아요. 복수하는 거."

"아, 저는 본방은 못 봐서 다운로드해 보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하던데요."

"근데, 주인공 그 송 뭐시기는 아직도 연기가 안 느는 것 같아요."

"원래 그렇잖아요. 연기력 기대하고 보는 캐릭터는 아니라 그냥 봅니다."

"나도 그런 입장에 놓이면 죽이고 싶을 거 같던데..."

"맞아요. 저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버릴 것 같아요."


그날 점심식사 자리의 대화는 대충 자연스럽게 흘러가 마무리되었다. 차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이어지는 대화에서 우리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송혜교가 나오는 '더 글로리'를 얘기했고, 나는 송중기가 나오는 '재벌집 막내아들'을 얘기했다. 이게 다 대명사만을 사용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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