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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론산바몬드 Apr 06. 2023

빨간 파인애플을 본 적 있나요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2001년 겨울,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덕분에 난생처음 비행기도 타보고, 하룻밤에 몇십만 원 하는 호텔이라는 곳도 가봤다. 가는 모든 곳이, 그리고 보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천지연 폭포와 용두암을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파인애플을 파는 가게가 보였다. 여태껏 말로만 들었지 단 한 번도 파인애플을 만져본 적도, 맛본 적도 없었기에 이참에 망설임 없이 한 통을 샀다. 파인애플을 처음 접하기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 맛이 자못 궁금했다.


저녁이 이슥할 무렵 약간 허기가 있어 우리는 파인애플을 먹기로 했다. 호텔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칼이나 칼을 대신할 만한 도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땐 호텔 숙박이 처음이라 카운터에서 칼을 빌릴 수 있다는 걸 몰랐다. 파인애플 하나 먹자고 칼을 사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쳐다만 볼 수도 없는 상황, 그냥 앞니로 껍질을 까기로 했다.


아내는 껍질이 단단해서 까기 힘들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아내에게 꼭 파인애플 맛을 선보이고 싶은 호기로움에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껍질은 굵고 질겼지만 내 앞니도 강했다. 차츰 파인애플의 노란 속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의 3분의 1 가량을 벗겨내자 노랗던 파인애플에 붉은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며 계속 껍질을 벗기는데 파인애플은 점점 더 붉어졌다. 신기해서 아내에게 물었다.

“빨간 파인애플 있다는 얘기 들어봤어요?”

“에이, 그럴 리가요?”

머리를 빗던 아내가 파인애플을 들고 비죽 웃고 있는 나를 돌아보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앗, 당신 입에 그거!”

“엥?”


거울을 보니 위아래 잇몸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파인애플 껍질에 잇몸이 까지는 줄도 몰랐다. 그래도 노란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파인애플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아내는 피 흘린 김에 마저 더 까라고 했다. 

“피 계속 나는데 괜찮을까요?”

“까라면 까요!”


결국 한 통을 다 벗겨 먹었다. 피는 좀체 멎지 않았고, 그날 밤엔 키스를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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