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여자와 임용시험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by 구론산바몬드

선배 C를 다시 만난 건 한창 임용고사를 준비하느라 바쁜 4학년 2학기 가을이었다. (이글에서 말하는 선배 C 다른 <가죽재킷과 트렌치코트> 등장하는 선배와 동일한 인물이다.) 두 학기를 쉬고 복학한 C는 여전히 학과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강남 부잣집 아들이라 했다. 희고 스포티한 차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뜬소문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그와 더 친해지기로 결심했다.


한날은 그가 여자를 소개해 주면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그는 잘생기고 키도 훤칠한 것이 겉으로만 보면 바람둥이처럼 보였지만 사실 별로 숫기가 없었다. 모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열심히 여자를 물색하다 같은 수업을 듣는 타과의 여학생을 물망에 올렸다. 대충 예쁜 축에 속하고 여위다 싶을 정도로 날씬하며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한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C는 꽤 흡족해하며 당장 그녀를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일단 착수금으로 밥을 사면 그녀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자마자 그는 방법을 말해달라고 재촉했다. 사실 미팅도 연애도 한번 안 해 본 내가 그 방법을 알 리 없었다. 어쨌든 밥값은 해야 했고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 방법인즉슨 이랬다. 보통의 여자는 누군가의 소개로 남자를 만나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우연한 만남을 좋아한다. 그러니 그녀와 우연히 만나 대화할 기회를 만들어라. 이것이 나의 조언이었다. 그는 우연한 만남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고 재차 물었다. 밥 한 그릇을 더 주문했다. 바둑판과 바둑알을 들고 그녀의 자취방 근처 길목에 매복하라. 그녀가 나타나면 길을 비켜 가는 척하다 몸을 부딪치며 바둑알을 떨어뜨려라. 그러면 그녀는 미안해하며 바둑알을 같이 주워줄 것이고, 수백 개의 바둑알을 줍는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하여 그녀에게 호감을 주어라. 그러면 그녀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꽤 흡족해했다. 젠장, 더 비싼 식당에 갔어야 했다.


몇 달이 지나 12월 어느 날 그를 다시 만났다. 바둑알을 들고 기다렸지만 막상 그녀가 나타나니 감히 부딪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외모는 무척 마음에 들었고 이상형에 가깝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며 같이 그녀를 미행하자고 했다. 중등교원 임용시험을 10일쯤 앞둔 날이었다.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또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도서관을 나서는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미행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녀는 참으로 많은 곳을 쏘다녔고 우리는 일찌감치 지쳐버렸다. 그러다 늦은 오후 어둠이 깔릴 즈음 버스에서 내려 어느 병원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겨울바람은 매서웠고 나는 재킷도 없이 셔츠 바람으로 떨었다. 기다리다 못해 우리는 병원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병원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하필 막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그녀와 얼굴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는 그녀를 뒤로 하고 우리는 도망치듯 병원을 뛰쳐나왔다. 쪽팔린다며 그녀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C가 말했다. 그리고는 버스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밥은 사주지 않았다.


종일 추위에 떨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감기에 걸려버렸고 근 일주일을 앓았다. 당연히 임용고사는 말아먹었다. 선배 때문에 암담했던 내 미래는 더 어두워졌다. 앞으로 그를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혹여라도 만나게 된다면 CF의 정우성 버전으로 이렇게 외치고 싶다. 가! 가란 말이야! 선배를 만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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