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중국 고사에 의하면, 옛날 어느 왕이 현인들을 모아 우매한 백성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글을 진상하라는 명을 내렸다. 현인들은 온갖 지혜를 모아 12권의 책을 완성했다. 그러나 왕은 생업에 바쁜 백성들이 12권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여 줄이기를 원했다. 다시 현인들이 한 권으로 축약하여 바쳤으나 왕은 그 또한 두껍다 하며 한 문장으로 만들라 했다. 결국 현인들이 만든 한 문장이 왕을 만족시켰다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가 그것이다. 정말 그런가.
대학 2학년을 마친 겨울방학이었다. 연말 연초의 들뜬 분위기가 지나고 1월 말을 넘기는 즈음이었던 것 같다. 학교를 찾는 친구들의 발걸음이 뜸했다. 친구들이 없다는 것은 곧 밥을 사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독서실에서 얇은 이불을 덮고 누워 나는 보름여를 꼬박 굶었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죽더라도 나의 죽음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실장조차 들여다보지 않는 골방 어둠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오래간만에 들른 캠퍼스 운동장에는 관광버스 몇 대가 시동을 걸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의 선후배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었다. 사범대 학생회 주최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간다고 했다. 왜 내게는 말해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참가비가 있어서 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딱히 전달할 연락처도 없지 않냐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살인을 하는구나 싶었다. 마음속으로 그의 등에 칼을 몇 번 박았다.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는 버스에 올랐다. 오리엔테이션은 2박 3일 일정이었고, 그럼 3일간은 밥을 먹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살 수 있었다.
애초 밥을 얻어먹는 것이 목적이었던 만큼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환영해야 하는 신입생이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충청도 어느 리조트였던 것 같다. 첫 2일 간 무척 행복했다. 식사는 물론 간식도 충분히 제공되었다. 꽤 기운을 회복한 나는 막 출소한 장기수처럼 들떠 있었다. 후배들과 어울려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후배들과의 대화 시간으로 진행되었고 막걸리가 푸짐하게 제공되었다. 후배들이 원을 그리고 앉았고, 선배들은 안쪽에 원을 그리고 앉았다. 선배들이 오른쪽으로 한 칸씩 돌며 모든 후배들과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형식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후배들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쇠로 된 공기에 넙죽넙죽 받아 마신 기억밖에 없다.
다음날 아침 취기로 인한 두통과 갈증으로 눈을 떴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붉은 악마의 응원복을 입고 있었다. 아니, 붉은 옷이 아니라 그건 분명 피였다. 앞섶을 흥건하게 적실만큼 많은 피를 누군가가 내 옷에 흘렸던 것이다. 일찍 잠에서 깬 친구들과 후배들이 나를 둘러싸고 괜찮으냐고 했다. 턱에 뭔가가 만져졌다.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보았다. 턱에 거즈가 반창고로 붙여져 있었고, 얼굴 여기저기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거울에게 묻고 싶었다. "거울아, 거울아, 저게 누구니?"
나는 간밤에 막걸리를 마시다 말고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비척거리며 앞으로 쓰러졌고, 때마침 놓여 있던 쇠그릇에 턱을 찍었다.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몇 바늘을 꼬매고 돌아왔다. 다수의 목격담을 종합하면 그랬다.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 그냥 쥐가 되고 싶었다. 사범대 학생회 간부들이 찾아와 이런 사고를 예측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이라며 사과했다. 병원비도 전액 학생회비로 지불했다고 했다. 부끄럽고 아픈 가운데서도 돈 안 내도 된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다행히 얼굴뼈와 이는 이상이 없었다. 찢어진 턱만이 아팠다. 누가 밥을 사 준대도 먹을 수 없었다. 앞니로도 옆니로도 아무것도 씹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여를 다시 굶었다. 병원 갈 돈이 없어 실밥도 뽑지 못하고 살과 실이 엉켜 붙고 있었다. 중국 고사의 왕이 말한 우매한 백성이 바로 나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절감했다. 하지만 턱이 낫고 다시 씹을 힘이 생겼을 때 나는 또 공짜밥을 찾아다녔다. 세상에 공짜는 있다. 대가가 혹독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