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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취 Oct 21. 2020

아이와 함께 나로 살아가기

우리는 1+1

  아이의 별명은 '1+1'이다.  내 남편은 주말에 출근하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난 아이를 꼭 데리고 다녔다. 그걸 보고 친구가 아이에게 늘 따라온다는 의미에서 '1+1'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이가 아기일 땐 힙시트로 내 앞에 딱 붙어서 한 몸처럼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고, 복직 후엔 운전을 배워 차 뒤에 태운 후 데리고 다녔다. 좀 더 크면 '+'는 사라질 예정이다. 아이는 이제 6살이다. 벌써 밖에 나가자는 내게 가끔씩 '나 두고 가'라는 말을 한다. 아이가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때가 되면 우린 '+'없이 각자 '1'로써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우선으로 돌보며 각자 독립적인 시간을 보낼 것이다.  




 영적 교사 바이런 케이티는 세상에는 세 가지 일이 있다고 말한다. 나의 일, 남의 일, 신의 일.
 우리가 기쁨을 잃는 까닭은 대부분 자기 일에서 벗어나 남의 일, 신의 일에 불만을 갖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 류시화 님의 페이스북 글 중-


나의 일이다. 

학교에 있는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관찰한다. 바람이 많이 불어 갑자기 추워지는 이 계절에 반팔만 입고 등교하지는 않는지, 수학 시간에 잘 모르는데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본다. 퇴근하고 아이를 데리러 태권도에 간다. 저녁을 후딱 해서 먹으며 아이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공유한다. 그리고 다이어트 댄스반 수업을 밴드라이브로 참여한다. 그럼 아이는 나와 함께  번 따라 하다가 재미없는지 만화책을 보기 시작한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가 읽어달라는 책 몇 권을 읽어주고 잠자리에 들어간다. 나는 새벽에 먼저 일어나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남의 일이다. 

아이가 밥을 잘 안 먹는다. 아침을 차려놔도 몇 숟갈 먹지 않는다. 어차피 잘 안 먹는 거 시리얼로 아침식사를 바꿨다. 유치원에서 영양소 따져 만든 급식을 점심으로 잘 먹겠지 생각한다. 속상해하지 않는다.



신의 일이다. 

아이는 아침을 잘 안 먹어도 아직까지 큰 병치레 없이 잘 크고 있다. 그저 감사하다.



나는 바쁜 와중에도 나의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는 나의  일(책 읽기, 운동 등)을 꾸준히 하는 나를 보며 엄마에게도 엄마의 세계가 있음을 인식하며 남을 존중하는 방법을 익힌다.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일에 집중해야 함을 배운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이 있고, 그것을 우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을 돕는 건, 자신의 일을 다 하고 내게 충분한 여력이 남아있을 때 한다. 그리고 상대가 도움을 원할 때만 남을 도와야 한다. 원치 않는데 하는 말이나 행동은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선을 넘는 행동이다. 이는 엄마와 자식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엄마도 충분히 여력이 있을 때 아이와 즐겁게 대화할 수 있으며 아이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엄마의 일방적인 희생은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들거나, 아이에게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을 줄 수 있다. 엄마와 아이의 사이에도 넘지 않아야 할 선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한글을 읽지 못해도 걱정하지 않는다. 조바심에 억지로 가르치지 않는다. 궁금해하면 그가르치려 한다. 아직은 전혀 관심이 없다. 대신 아이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지켜본다. 아이는 물건을 사고파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사 올 때 내가 당근 마켓으로 물건을 파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직거래를 할 때마다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집 앞에 같이 서있기도 했고, 차의 조수석에서 물건을 건네는 나를 보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는 자기도 돈을 벌겠다며 그림을 그리고, 팔찌를 만들고 당근 마켓에 그것들을 올리라고 한다. 코로나 19가 잠잠해지면 플리마켓에 셀러로 아이의 물건을 직접 팔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할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남의 영역이자 신의 영역이다. 벌써 아이는 내가 먼저 보여준 적이 없는 신비 아파트를 좋아하고, 요괴 워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 아이가 좀 더 크면 아이는 공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거다. 하지만 아이 역시 자신의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모른다. 사람의 인생은 순간의 선택으로 좌우되기도 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발생하기도 한다. 내가 교사가 되기로 결정한 건 대입원서를 넣기 일주일 전이였다. 원래 교사는 나의 꿈이 아니었다. 또한 나는 지금처럼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게 될지 몰랐다. 대입 논술시험을 준비할 때 학원 선생님은 내 글과 나를 앞에 두고 한숨을 참 많이 쉬셨다.  글쓰기가 너무 싫었다.

 


 아이는 내가 원치 않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선택에 대한 응원과 격려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지켜보는 수 밖엔 없다. 신의 일은 나도, 남도, 누구도 통제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나의 일이 무엇인지 고 이것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아이가 내가 원한대로 되지 않더라도, 아이에게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학교에서 십여 년간 아이들을 지켜본 결과 아이들은 대게 어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삶의 태도를 배웠다. 아이들이 넘어졌을 때, 주변에서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어'라말하면 아이들은 그걸 듣고 일어났다. 그리고 왜 넘어졌는지 이유를 기억해 다시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말은 '넘어지지 마'라는 말보단 '일어설 수 있어'라는 말이었다. 성장하는 매 순간이 과정이라고, 실수해도 여기서 배우면 된다고 아이들을 다독이면, 벌어진 일들로 울상을 짓던 아이들 이어도 금방 웃었다.



 하지만 이걸 아는 나도 학교에서 집에 오면 내 아이에겐 사실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한글을 다 깨치고 일기를 쓰는 주변 아이들을 보며 '내 아이만 뒤쳐지는 건 아닐까?'생각하고, 유치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보며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불안한 날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나의 일, 남의 일, 신의 일'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나의 일'뿐이다. 나는 그저 단단한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아이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응원하고 지지하며 격려한다.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며, 삶의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기고 어떻게 클지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나는 아이가 도움이 필요할 때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내 세계를 잘 가꾼다. 불안에 휩싸이지 않고 중심을 잡고 판단할 수 있는 '나'이자 '엄마'이고 싶다.



 난 다만 너를 잠시 맡아 보호하고 있을 뿐. 정말 너를 돌보는 것은 내가 아니고 신이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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