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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취 Feb 11. 2021

호주가 날 응원해

 행복했던 순간

 나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며 생긴 취미가 여행이었다. 여행지를 고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점차 스트레스가 쌓이면 가격이 저렴한 비행기 표를 검색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학기 말 스트레스가 넘칠 때쯤이면 이미 난 한국어가 들리지 않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내게 여행은 스트레스 관리법이었고 버거운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였다.



 교사가 된 지 5년 차 나는 겨울 방학을 거의 꽉 채운 4주간 호주로 떠났다. 두꺼운 패딩을 입는 추운 겨울에서 민소매 티셔츠와 짧은 바지를 입는 더운 여름으로 가는 여행이었다. 온갖 잡념과 힘든 마음을 공항에 다 두고 깃털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넓은 호주 땅덩어리에서 내가 처음 선택한 곳은 '애들레이드'라는 남부에 있는 도시였다. 그곳에 멀지 않은 곳에 캥거루 아일랜드가 있었다. 지명만 보고 캥거루를 볼 수 있겠다 싶어 시드니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 애들레이드로 바로 갔다. 예약해 두었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 길을 잃을까 두려웠던 마음이 안도감으로 바뀌며 여행 온 것이 실감 났다. 다음날 바로 2박 3일 그룹 투어로 캥거루 아일랜드로 떠났다.  


 호주는 워낙 땅이 넓어 교외로 가는 대중교통이 발달해있지 않은 탓에 봉고차 하나에 여러 명이 타고 함께 다니는 그룹 투어가 발달되어 있었다. 덕분에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과 만났고 공원에서 바비큐를 해 먹으며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나는 거기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대만인 마야와 금방 친해졌다. 그녀는 호주의 다른 지역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인데 쉬는 날 여행을 온 거라 했다. 그녀와 remarkable rocks에 앉아 노을을 보며 함께 20대 후반 여성으로서의 일, 사랑, 결혼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만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내가 보고 싶던 호주의 동물들은 숙소 주변만 돌아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짐을 풀고 한 바퀴 산책을 하는데 캥거루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캥거루 무리에게 다가가니 사슴 농장 주변에서 날법한 냄새가 마구 났다. 냄새를 맡은 후 내 머릿속 인형같이 귀여웠던 캥거루가 순식간에 흔히 보던 그냥 동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풀을 뜯으며 날 힐끔 쳐다보는 눈빛이 매섭게 느껴졌다. 떼로 달려들까 무서워 슬금슬금 최대한 티 안 나게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캥거루에 대해 갖고 있던 환상이 금방 깨졌다.

캥거루 아일랜드의 캥거루


 애들레이드 도심으로 돌아와 근교 와이너리 투어를 한 후 멜버른으로 갔다. 멜버른에 가는 길목에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하는 곳으로 자주 선정되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가 있었다. 그래서 유명한 해안도로를 보기 위해 다시 2박 3일 투어를 신청했다. 이번 투어 팀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혼자 온 유럽인들이 많았다. 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동양인이기에 자연스레 그들과 어울렸다. 특히 그들 중 독일인 제니와 친해졌다. 그녀는 햇빛만 보면 어디든 옷을 훌렁 벗고 비키니만 입은 채 일광욕을 즐겼다. 갑자기 그런 그녀를 보며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키니만 입고 바닷가를 활보했다. 그리고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멋진 풍경을 배경 삼아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쭈뼛거렸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속이 후련하고 짜릿했다. 한국인 커플의 이상하게 보는 눈빛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


 멜버른에 도착해선 애들레이드 와이너리 투어에서 만났던 대만인 웨이루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서빙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일이 끝나고 저녁에 만나 클럽에 갔다. 우리가 간 수요일은 '레이디스 나잇'이어서 여성은 칵테일 1잔과 입장료가 무료였다. 밤 12시가 되자 클럽 안은 인산인해가 되었다. 신나게 춤을 추다가 우뚝 솟아있는 스테이지를 보았다.

‘여행 온 김에 함 올라가 봐?’

라고 생각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도 현지에 사는 친구를 만난 덕분에 해본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녀의 소개로 힙한 카페도 가고 근교 바닷가에 가서 거기 사는 펭귄도 보았다. 펭귄은 추운 남극에만 사는 줄 알았는데 더운 여름 날씨에도 펭귄이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


 시드니가 호주에서의 마지막 여행지였다.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6시면 대부분의 상점이 닫아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호주 사람들은 대부분 6시에는 집에 들어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밤 9시가 넘어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서울의 가게들과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시드니 미술관엔 'Thursday night'이 있었다. 금요일이 다른 요일보다 더 일찍 끝나는 대신 목요일을 밤 9시까지 오픈한다고 했다. 금요일 저녁 집에 가는 호주 사람들과 밖에서 회식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눈 앞에 대조적으로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선 가족은 중시한다고 하지만, 정작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선 무심한건 아닐까.


 시드니는 바다와 인접해있고 주변엔 섬이 많아 섬을 오가는 페리가 대중교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일주일 패스를 끊어 자유롭게 페리를 타며 발길이 닿는 대로 섬을 돌아다녔다. 집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시드니의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배에 몸을 실었고 좌석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외할머니는 호주에 오기 6달 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부고 전화를 받았을 때 학교에서 스카우트 대원들을 모아 주말에 갈 1박 2일 캠프에 대해 설명하려던 참이었다. 할머니 상을 치르자마자 바로 학교로 가서 학생들을 인솔했다. 혼자 40여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에버랜드와 캐리비안베이에 방문해 1박을 해야 했다. 안전 문제로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학교에선 나와 함께 학생들을 인솔할 사람을 배정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진 남녀 방을 혼자 오갔다. 할머니에 대한 감정은 한구석에 방치했다. 집에 도착한 다음 날 바로 출근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남자애들 방에서 생긴 일로 학교로 항의 전화가 왔다. 돌아와서도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4개월 후 갑자기 배 위에서 그때 묻어둔 할머니에 대한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우리와 함께 살았다. 일을 시작한 엄마 대신 오셔서 우리 세 남매의 밥을 챙겨 주셨다. 그중 난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이 받고 싶은 둘째 딸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따라 음식 하는 것도 돕고 할머니의 옆에 붙어 이야기하시는 걸 열심히 들었다. 주로 할머니의 한 많은 인생 이야기였고 거기에 엄마, 아빠 이야기도 간혹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크면서 할머니와 따로 살게 되었다. 그 이후론 가끔 할머니를 뵀고 돌아가시기 전엔 1년 전에 뵌 게 다였다.


  배에 타 혼자 자유로움에 취해 행복해하며 웃고 있다가 할머니를 떠올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돌연 엉엉 울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맘껏 울고 나니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편해졌다. 눈물이 마르기까진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잠깐이었다. 이렇게 잠깐이면 되는데 왜 한국에선 할머니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울 수 없었을까? 그 날 이후 할머니를 꿈에서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긴 여행을 마무리하고 며칠 후 집에 돌아왔다. 그 이후에도 여행은 몇 번 더 갔지만,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뽑으라면 무조건 난 호주 여행이 떠오른다. 호주에는 동물원을 가지 않아도  수 있는 코알라, 펠리컨, 캥거루, 바다표범, 흑조 등의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동물들이 살아가는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이 있었다. 가족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하는 분위기가 녹아든 문화는 편리함에 신경 쓰지 않았던 내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는 발걸음은 타지에서 날 더 나답게 만들어주었다.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슬픈 감정마저 끄집어 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슬픔을 제대로 소화하고 다시 나는 환하게 웃었다. 내 인생 가장 시원한 웃음이었다.


호주에서 만난 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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