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출근하지 않았더니 인생이 시작되었다.

by 유정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동안 너무 바빠 1년이 넘도록 친구를 아무도 못 만났는데, 주말이니 내 생일파티 겸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졸업 후 한 번도 못 봤던 동기 몇 명도 온다고 했다. 짜식들.. 고마웠다. 우리는 대학 시절 모든 게 우리 세상인 것처럼 돌아다니던 신촌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래, 그날도 출근하긴 하는데, 그래도 토요일이고 생일인데 저녁 7시 전엔 끝나겠지. 7시에 보자.”


약속 당일. 아침부터 출근해 점심은 대충 김밥으로 때우고 일만 했다. 목표는 7시 전 퇴근이었다. 그런데 오후 3시, 외부 미팅을 다녀온 팀장님이 막 짜증을 내며 “아~ 오늘 또 밤샘이다. 어제 낸 기획서 전면 재수정이야. 일단 오늘까지 초안 다시 잡아서 내야 해”라고 한다.


헉!! 우려했던 일이!! 제발 오늘만은 일찍 가고 싶었는데…. 내 사수인 대리님에게 나 오늘 생일이라 약속이 있다고 살짝 어필을 해 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 너 마음 충분히 알겠는데 지금 상황이 이러니 어떡하니. 일단 초안만 잡고 가~”


결국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날 정말 빨리 퇴근하려고 저녁도 안 먹고 일했지만, 일이 끝난 시간은 생일이 지난 새벽 2시였다. 7시부터 모여서 나를 기다리며 술을 마시던 10명의 친구들은, 새벽 2시에 나 이제 끝났다고, 어디로 가면 되냐고 전화하자 “애들 다 취해서 집에 갔어~ 방금 다 택시 타고 가서 딱 2명만 남았어”라고 했다. 둘 뿐이라니.. 빨리 오려고 그렇게 미친 듯이 일했는데... 속상함 반 미안함 반의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가 남은 친구들 얼굴만 보고 집에 돌려보냈다. 그렇게 28살의 내 생일은 지나갔다. 일이 전부였던 내 20대 후반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퇴사 후 15년이 지났다. 그 시절의 나를 되돌아본다. 매 순간이 너무 힘들고 답답해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 화장실에서 울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자리에 앉아 일했던 날들. 새벽 12시-1시 즈음, 회사 뒤 아무도 없는 공원의 작은 놀이터에서 그만두겠다고 꺼이꺼이 울부짖던 시간들. 그곳의 축축한 밤공기와 검은 미끄럼틀, 빈 그네, 그리고 조용히 나를 비껴 비추던 가로등이 생각난다. 새벽 2-3시가 평균 퇴근시간이던 시절, 오전 8시까지 다시 출근해야 하는데 왕복 4시간 거리의 집에 갔다 올 수가 없어 몇 달을 지냈던 회사 근처 찜질방의 눅눅한 공기, 퀴퀴한 냄새와 사람들의 낮은 코골이 소리가 생각난다.


새벽에 이런 곳에서 혼자 우는 여자라니... 아무 일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주말 상관없이 매일 회사에 가고, 새벽에 출근해 새벽에 퇴근하니 요일과 계절 감각이 아예 없었던 시절이다. 잠을 못 자고 몽롱한 상태가 오래되면 식욕도 없어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점심시간에는 밥을 포기하고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잤고, 식사는 동료들이 사 온 김밥으로 대신했다.


남자친구 만날 시간이 없어 한 달에 한번, 그나마 일찍 퇴근한 시간인 밤 12시에나 겨우 잠깐 얼굴 볼 수 있었다. 그 시간에 갈 곳이 없어 새벽까지 문을 여는 호프집에서 만나곤 했는데, 그렇게 만나봤자 이미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 때라서 만날 때마다 울거나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다른 20대처럼 예쁘게 차려입고 예쁜 카페나 경치 좋은 곳에서 웃으며 데이트를 하고 싶었지만, 그런 건 나에게 진정 사치였다. 오랜 시간 혼자 나를 기다린 남자친구 입장에서도, 만나기 힘들고 전화 통화해도 울거나 힘들다고 하소연만 하는 그런 여자친구와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시간들이 반복되니 퇴사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일만 하다 흘러가는 내 20대가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회사 동료와 선배들, 친구들, 심지어 부모님까지 모두 나를 말렸다. 울며 불며 나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해도 다들 비슷한 대답뿐이었다. 회사가 원래 그런 거라고. 나가봤자 별 거 있냐고. 다른 데도 다 똑같다고…


친구 누구는 사업한다고 회사 나갔다가 빚만 몇억을 졌다더라, 누구는 아무 계획 없이 퇴사했다가 몇 년째 놀고만 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만 괴담처럼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면 내 옆에 앉은 대리님도, 과장님도, 팀장님도 다 저렇게 밤새면서 일하는데 나만 유난인가 싶기도 했다. 다들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내가 뭐라고…


그래서 나는 첫 퇴사 생각을 하고 나서 2년을 더 버티다 29살이 되던 해, 그리고 직장인 4년 차가 되던 해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5년 넘게 한 가지 일만 하면 그때는 정말 두려워서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30살이 되기 전에 그 구렁텅이에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우선 몸이 너무 안 좋았다. 회사만 가면 소화가 안 됐고, 피부는 스트레스로 빨갛게 트러블 범벅이 된 지 오래라 물만 닿아도 따가웠고, 출퇴근 버스만 타면 구역질이 나오려 했다. 그래서, 아무 준비 없이, 우선 살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생각은 그 이후에 해야 했다. 그 안에선 너무 바쁘고 몽롱해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둡고, 사방이 가로막혀 있는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그럼 넌 이제 뭐해서 먹고 살꺼야?” 라며 호기심 반 걱정 반의 눈빛으로 질문을 하던 동료들과, ‘쟤는 저것도 못 버티나’ 하던 상사들의 눈초리, 그러면서도 부럽다고 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10년 뒤의 내 모습이 어떻게 될지. 후회하진 않을지. 난 뭘 하고 있을지. 그때는 웃고 있을지. 아니면 내가 익히 들었던 수많은 괴담들처럼 더 안 좋은 인생을 살고 있을지…


지금은 퇴사한 날로부터 15년이 지났다. 다행히 지금은 회사 다닐 때보다 1/10도 안 되는 시간만 일을 하며 10배 이상의 수익을 벌고 있다. 심지어 일을 아예 안 하는 날도 많은데 그럴 때도 여전히 수입은 들어온다.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활동을 하며 예전보다 훨씬 행복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회사를 나와 만난 다양한 사람들 덕분에 세상 보는 눈도 한층 넓어졌고, 무엇을 새로 시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물론 너무 힘들고 후회되고 앞이 막막했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이 글은, 15년 전 매일 울며 회사를 다니던 나에게 건네는 글이다. 퇴사는 하고 싶은데 울타리 밖의 세상이 너무 막막하고 두려웠던 20대 끝자락의 나에게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버티는 지금의 20-30대에게, 주변엔 다 비슷한 직장인들 뿐이라 어디서부터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 책은 대단한 성공담은 아니다. 오히려 많이 불안했고, 실패했고, 돌아가기도 많이 돌아갔던, 아무 준비 없이 회사를 뛰쳐나간 선배의 뒷이야기 정도가 될 것 같다. 사업에 대한 엄청난 꿈과 목표가 있진 않았지만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어찌어찌 사업을 하게 된 이야기. 직장인의 세계를 벗어나 사업가들 사이에서 아등바등하다가 비로소 내 자리를 찾게 된 이야기.


분명한 건, 퇴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라는 것이다. 이 글이 나처럼 망설이는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를 주길 바란다. 꼭 대단한 계획을 세운 후 무엇을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우리는 생각보다 스스로 더 잘 살아낼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직 가슴속 불꽃이 살아있는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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