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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쓸신팝 Mar 25. 2024

[영파씨] 핫 루키의 리얼 힙합, 영파씨

(영파씨 컴백 ⏐ 영파씨 XXL ⏐영파씨 앨범)

4세대 걸그룹들의 대전성시대가 열렸다고는 하지만, 모든 걸그룹들의 상황이 똑같지는 않았다. 기획부터 사운드까지 빈틈없는 완성도의 준비를 마치고 가요계에 출격한 대형 기획사 출신 걸그룹들은 시작부터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지만, 중소 기획사 소속 그룹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청순, 걸크러시, 하이틴 등의 천편일률화된 콘셉트로는 인기 아이돌 그룹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고, 음악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제2의 누군가’가 아닌 본연의 정체성으로 독보적인 색깔을 뽐내는 신인 여자 아이돌 한 팀이 있다. 누구나 시도할 법한 하이틴 프레피룩 콘셉트나 화려한 공주풍의 스타일링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줏대 있는 걸그룹. 그들의 이름은 바로 ‘영파씨’다. 강렬한 힙합 사운드와 재치와 진솔함을 겸비한 메시지, 그리고 타고난 에너지와 패기로 똘똘 뭉친 이들은 ‘모두가 함께 힘을 합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그룹명의 의미처럼 당찬 포부와 함께 독자적인 활로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출처] 영파씨 공식 SNS
빠져들면 답도 없는 '마카로니 치즈'

카라, 레인보우, 에이프릴 등 주로 화려하거나 러블리한 이미지를 강조한 비주얼 중심의 걸그룹을 제작해 왔던 DSP가 의외의 카드를 던졌다. 힙합과 랩을 무기로 삼은, 유쾌하고 통통 튀는 이미지의 여자 아이돌이라니. DSP의 걸그룹 계보를 완전히 거스르는 유형의 팀이었기에 영파씨를 향한 첫인상은 신기함 반, 어색함 반이었다. 정선혜, 위연정, 지아나, 도은, 한지은까지 총 다섯 명의 멤버로 구성된 이들은 데뷔 당시 평균 나이가 만 16.6세에 불과했고, 막내인 한지은은 무려 2009년생이다. 처음에는 ‘이 어린 친구들이 과연 강한 비트와 독한 가사의 힙합을 멋스럽게 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모든 걱정은 기우였다. 이 자유분방한 다섯 소녀들은 ‘힙합 아이돌’로서 무언가를 의식하기보다는 그저 본인들만의 방식으로 음악과 퍼포먼스를 즐길 줄 아는 아티스트일 뿐이었다.


[출처] 영파씨 공식 SNS

영파씨의 범상치 않은 정체성을 알리는 건 데뷔곡 ‘MACARONI CHEESE’만으로 충분했다. ‘메건 더 스탤리언’, ‘라토’, ‘카디 비’ 등 해외 여성 래퍼들의 음악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트랩 비트의 곡이었으나 사운드에 내재된 메시지는 외국 힙합의 매콤함과는 영 딴판이었다. ‘마카로니 치즈’라는 가사가 단순히 반복되는 것은 물론 맛있는 간식을 먹고 싶다는 유쾌한 이야기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서가 힙합스럽지 않다고 해서 문제가 됐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10대인 영파씨 멤버들의 개구쟁이 같은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사였고, 비트 위를 달리는 멤버들의 랩핑이 생각보다 탄탄해 힙합을 차용한 이들의 시도가 전혀 무리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예쁘고 소녀다운 이미지의 걸그룹이 주류가 된 시장에서 게임 체인저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겠다는 잠재력을 발휘한 데뷔곡이었다.


[출처] 영파씨 공식 SNS
젠지(Gen-Z) 아이돌의 서태지 소환술

데뷔곡 ‘MACARONI CHEESE’의 지향점이 미국의 핫한 여성 래퍼들이었다면, 이번 신보는 한국의 9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영파씨가 소환한 뮤지션은 한국 1세대 힙합의 주역,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선배들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들의 대표곡 ‘Come Back Home’을 타이틀곡 ‘XXL’에 오마주해 90년대 올드스쿨 힙합을 젠지(Gen-Z) 세대만의 힙한 매력으로 신선하게 풀어냈다. 해외 힙합을 표방한 데뷔곡의 경우, 국내 대중에게 낯설 수 있는 영역이라 크게 이슈가 되진 못했다. 반면 신곡 ‘XXL’은 서태지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친숙한 힙합 리듬이 흐르고 있어 음악 자체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지 않고, 영파씨라는 그룹에 대한 사람들의 주목도도 높아질 가능성을 충분히 갖췄다.


[출처] 영파씨 공식 SNS

연이어 힙합 아이돌로서의 정체성을 각인시킨 영파씨의 음악색은 [XXL]을 통해 더욱 짙어졌다. 우선 앨범의 키워드부터가 ‘XXL’이다. 미국의 저명한 힙합 매거진 ‘XXL’를 메인 소재로 활용하고, 잡지의 커버를 장식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담은 것만으로도 어린 소녀들의 담대한 ‘힙합 정신’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들이 힙합을 단순히 콘셉트의 한 가지 수단이 아닌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은 수록곡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레이지 힙합을 가져온 수록곡 ‘Scars’나 올드스쿨 붐뱁 비트의 ‘나의 이름은’은 멤버들이 직접 가사를 쓰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 이들이 속한 세대가 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자유롭게 수놓는다. 이제 갓 데뷔한 영파씨의 랩 실력을 베테랑 힙합 뮤지션들과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것이다. 하지만 본인들의 생각을 털어놓는 데 주저함이 없고, 아이돌 기준에서는 뛰어난 랩핑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힙합’을 추구하는 영파씨의 행보에는 마땅한 설득력과 리스펙이 더해진다.


[출처] 영파씨 공식 SNS
판을 더 크게 키워보겠다는 자신감

힙합을 정체성으로 삼은 팀을 찾아보기 힘든 K팝 신에서 영파씨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하다. 이들이 단순히 힙합을 액세서리처럼 사용하는 게 아닌 리스너들이 인정할 만한 사운드와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추구하는 방향성은 더욱 값지다. 물론 아이돌 걸그룹으로서는 주류의 감성과 거리가 있고, 매니악한 콘셉트와 음악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영파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쉽게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그룹에는 대체 불가능한 매력이 있고, 탄탄한 실력과 확실한 색깔의 음악이 뒷받침되고 있기에 이들의 우직한 행보에 환호성을 보낼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written by tim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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