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쓸신팝 Dec 08. 2023

[빅나티] 끝없는 비행을 누리며

한껏 찌푸린 인상과 빠르고 거친 워딩이 난무하던 TV 프로그램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얘기를 하던 열일곱의 소년, ‘랩이라면 응당 정확히 빠르게 내뱉는 것이 멋 아닌가’라는 구시대적 발상이 담긴 내 편견을 보란 듯이 깨부순 소년. 빅나티를 향한 내 첫인상이었다. 신선한 인상을 주었던 첫 만남도 잠시, 힙합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음악적 편식을 일삼던 내게 그의 잔상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후 그를 다시 마주한 건 다름 아닌 내 플레이리스트였다. ‘<쇼미더머니> 출신 힙합 가수’라는 타이틀은 잊은 지 오래였고, 우연히 듣게 된 노래가 좋다는 이유로 내 플레이리스트 한구석에 자리한 그의 이름으로 우리의 만남은 다시 시작되었다. ‘정이라고 하자’던 그의 외침 때문일까, 빛바랜 기억은 정이 되었는지 자꾸만 그의 음악을 찾게 되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지도 어느덧 1년, 그는 내가 보지 못했던 과거와 함께하고 있는 현재 동안 꾸준히 갈고 닦은 음악을 선보이며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륙을 준비하던 소년은 경로 없이 자유로이 비행하는 비행기가 되었고, 이번엔 친히 밴쿠버행 티켓을 가져왔다. 장거리 비행인 만큼 탑승 전에 착실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이륙을 준비하던 소년이 스스로 비행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우리는 그 시간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탑승할 필요가 있다. 



열일곱, 세상에 나를 알리다


음악을 좋아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음악과 가까운 환경에서 자란 빅나티는 우연히 어머니가 추천해 주신 빈지노의 [Dali, Van, Picasso]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첫인상에서부터 알 수 있듯 그의 롤모델은 빈지노이다. 아마도 이 앨범을 계기로 빈지노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라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힙합을 취미 삼아 즐기긴 했지만, 엘리트 모범생이라는 현실은 꿈으로 삼기엔 너무도 높은 벽이었다. 결국 음악에 미련을 버리기 위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쇼미더머니> 지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첫 등장부터 많은 관심을 받게 되며, 최종 3위를 수상하고 만다. 방송 종료 후 ' H1ghr Music(하이어 뮤직)'과 계약을 이루며 서동현이 아닌 빅나티로서 음악 활동을 밟아나갔다.



열여덟, 하나 둘 쌓여가는 조각

좌: [H1GHR : RED TAPE] / 우: [H1GHR : BLUE TAPE]

<쇼미더머니>가 끝난 뒤 시청자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던 '시발점 Remix'를 발표하며 정식 데뷔했고, 열일곱의 끝자락에 발매된 '휴(休)'를 통해 본격적으로 아티스트 빅나티의 조각을 하나둘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여덟을 맞이한 빅나티는 프로젝트 앨범, 피처링, OST 등 다방면으로 알찬 활동을 이어갔고, 2020년 9월, 훗날 자신의 첫 앨범에 영향을 주게 된 하이어 뮤직의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하며 베테랑 래퍼들과 진득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열아홉, 완성된 젊음의 Bucket List 

바쁜 한 해를 보낸 작년이었지만, 정작 단독으로 발매된 음원은 단 한 곡도 없었다. 이에 길었던 준비 기간이 마냥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는 듯 그는 처음으로 싱글이 아닌 앨범을 내놓았다. 사실 이 앨범은 열여덟 살에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해에 하이어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하며 프로덕션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기존 곡들을 모두 엎으면서 발매가 늦춰진 것이다. 


해당 앨범은 앨범명과 동일한 영화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에서 주인공의 무모함과 젊음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다. 한 인터뷰에서 [Bucket List]를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젊음'을 외친 이유도 이와 같다. 


첫 앨범인 [Bucket List]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각 트랙의 스타일을 겹치지 않게 하여 넓은 스펙트럼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7곡 중 무려 4곡이 기타 사운드를 메인으로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재즈, 포크, 록 등 각기 다른 스타일로 해석했고, 그 위에 힙합을 얹은 장르의 결합으로 듣는 재미를 더했다. 선공개 곡이었던 '커피가게 아가씨'는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를 샘플링한 것으로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를 앞에 내세워 힙합과 포크 감성의 공존을 이뤘고,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를 샘플링한 '멋진 신세계'는 록과 힙합의 완벽한 믹스를 보였다. 외에도 Minit가 프로듀싱한 '10년 후'는 EDM 트랙에 싱잉을 얹은 훅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젊음의 [Bucket List]였다. 그가 정의한 ‘젊음’은 다채로운 색상과 다양한 도전이 합쳐진 광막한 세상이었다. 어쩌면 그의 첫 앨범은 빅나티의 음악이 힙합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던 걸지도 모른다.



스물, 낭만을 꿈꾸는 R&B 아티스트

스물,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숫자. 스물이라는 숫자가 주는 힘은 위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보잘것없기도 하다. 마치 평생을 온갖 족쇄에 갇힌 채 살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유의 몸이 된 것처럼 살아가는 게, 고작 1초 차이로 오롯이 내 선택으로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렇기에 우리에게 스물은 오랫동안 고대해 온 순간이자 막상 마주하니 별거 없는 허무한 순간이기도 하다. 

빅나티가 선택한 스물은 낭만이었다. 스무 살의 서동현이 가장 관심 있어 하던 주제는 낭만이었고, 그는 자신의 두 번째 EP를 [낭만]이라 지었다. 지난 앨범에서는 넓은 스펙트럼을 입증했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힙합을 벗어나 R&B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쇼미더머니>가 시청자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순간이었다면, 이번엔 대중에게 빅나티라는 아티스트를 각인시킨 순간이었다. 


“힙합을 너무 좋아했기에 ‘난 힙합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살짝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랩을 음악적 도구로서 쓸 수는 있겠지만 힙합의 라이프스타일은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아직도 힙합적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건 알 것 같다. 앞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진실되게 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음악 활동을 이어가려고 한다.”


[낭만]은 힙합이라는 안전망을 걷어내고 더 넓은 음악의 세계로 가기 위해 ‘힙합이란 틀에서 적극적으로 탈피하는 시도를 한 첫 앨범’이었다. 이는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한 ‘정이라고 하자’를 통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언뜻 볼빨간사춘기가 생각나기도 하는 대중적인 이 곡을 선공개로 발표했다는 건 "더는 힙합에 한정 짓지 않을 테니 이 점 참고해서 지켜봐 주세요"라고 공표한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작전은 제대로 먹혔다. 결과적으로 예능과 연말 시상식에 참여하며 대중 가수로 살 수 있었고, 이후 발매된 [낭만]은 사람들의 높은 관심을 끌며 그를 힙합 하는 래퍼가 아닌 R&B 아티스트로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스물 하나, 마침내 시작된 비행 


좌: [호프리스 로맨틱] / 우: [ICN > YVR]

빅나티의 스물 하나는 그 어떤 때보다 농도 짙은 시기였을 것이다. 이전과는 또 다른, 그리고 정반대의 분위기의 두 장의 앨범을 발매하는 해였으니 말이다.


추운 겨울 서늘함을 풍기며 발매된 [호프리스 로맨틱]은 전작의 연장선으로 낭만의 끝을 이야기하며 사랑 이면에 드리운 허망함과 외로움을 담아낸 앨범이었다. 해당 앨범 역시 다채로운 구성을 선보였으나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단연 타이틀 곡인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이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미니멀한 멜로디와 웅장한 스트링 사운드의 조화, 그리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스물 하나의 빅나티가 그려낸 지나간 사랑의 덧없음이. 서늘한 냉기를 풍기는 아트워크는 사운드가 되었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허망함과 외로움은 서글픈 가사가 되었다. 이제 막 스물 하나가 된 지 두 달 차에 접어든 때, 그는 자신의 낭만의 끝을 말했다. 


고작 [낭만] 한 장만으로 그를 R&B 아티스트라 칭할 수 없다던 사람들도 [호프리스 로맨틱]에서는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륙을 준비하는 빅나티에게 불가능이란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는 경우의 수라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은 시작됐다. 그는 [ICN > YVR]를 통해 우리에게 밴쿠버 티켓을 건넸다. 전작이 R&B의 정수였다면, 이번은 록스타로서 발돋움이다. 강렬한 일렉 기타 사운드를 메인으로 가져와 또 한 번 장르 불문 아티스트의 면모를 보였고, 이젠 ‘R&B 아티스트’라는 수식어도 빅나티에겐 작은 옷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귀여운 멜빵 바지를 입고 빈지노를 외쳐대던 앳된 얼굴의 어린 소년은 어느덧 자신만의 활주로를 개척해 끝없는 비행을 누리고 있다. 더는 그를 하나의 장르로 가둘 순 없을 것이다. 



-  written by J -

매거진의 이전글 [태연] 태연이 전하는 가장 솔직한 감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