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을 피우고 블라인드를 반쯤 내린 창 앞에 앉았다. 담배 피우는 것이 가능했다면 피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두 분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으로 명상을 시작했다. 극 보다 더한 삶을 이고 져온 두 여인, 그들의 담배연기와 맞닿은 표정은 어린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었다.
내가 연기를 따라 생각을 옮기고 멈추며 바둥거리는 정도였다면 두 분은 다문 입술 사이로 타들어가는 마음을 챙겼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명상이었다. 명상은 정해진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연꽃좌ㆍ결가부좌
오른쪽 발은 왼쪽 허벅지 위에
왼쪽 발은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린다.
턱은 아래로 당겨 정면을 바라보고
두 손은 양 무릎에 자연스럽게 올리거나
배꼽 앞에 모은다.
결가부좌를 하면 허리는 자연스럽게 곧게 펴지나 배에 힘을 넣어보거나 등과 허리를 움직여 자신에게 맞는 자세로 다듬는다.
연꽃 자세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억지로 비틀듯 꼬아 올린 다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려오기 시작한다. 꺾인 발목, 무릎과 허리 역시 아픔이 이어진다. 호흡도 망상도 온 데 간데 없고 온통 아프고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 혈액 순환도 되지 않은 것 같고 이러다 다리에 이상이라도 생길 것 같다. 아픈 것만 생각한다. 아프고 또 아프다.
당장 다리를 풀어버렸다면... 괜찮다. 그러나 다시 결가부좌로 고쳐 앉자. 아프고 또 아픔을 계속 느끼자. 소리라도 지르고 아파서 방방 뛸 것 같은 지경에 이르러보자. 이미 우리는 명상에 들어갔다. 집중하고 있다. 그 아픔에 말이다. 아픔에 더 많이 집중하고 기다려보자. 오랫동안 견딜 수 있다면 그만큼 '아픔'이라는 일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픔에는 끝이 있다. 접히고 꺾일 듯 구부러진 무릎과 발목의 혈액이 순환이 안될수록 순환을 풀기 위해 기가 모인다. 그것이 아픔이다.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며 자세를 유지해보면 알겠지만 아프지 않을 때가 결국 온다. 기혈의 흐름이 원활해지는 것이다. '고비'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지나면 아픔은 줄어든다. 그러고 나면 명상의 다른 순간이 찾아온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진리다. 적어도 내게는. 굳이 겪지 않아도 좋을 고통도 있었고 시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모두 내 안에 담고 살아야 할,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가부좌의 아픔과 고통의 고비를 넘기면 오는 그 순간처럼 상처 받고 또 주는 것이 반복되는 내 삶에도 어떤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알아차리기 위해 명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