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파노 Nov 28. 2023

아일랜드 유랑기(5)

훌리건 청년들을 만나다!

기네스 박물관 근처를 걸어 다니면서 동물의 거대한 대변을 발견했다. 이것이 여기 있을 이유가 있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의 출처는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이었다. 더블린 곳곳에서는 사람들에게 일정 금액을 받고 마차를 태워줬다. 말이라는 동물을 가까이에서 본적이 별로 없었기에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유심히 보았다. 아마도 젊은 날은 경마장에서 혼신을 다해 보내고 은퇴를 해서 마차를 끌며 살아가는 말이라 여겨졌다. 그렇게 성 패트릭 성당을 지나쳐 가까운 곳에 있는 크라이스트 교회로 향했다. 

국교가 천주교다 보니 제법 많은 천주교회들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모든 게 문화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블린 다른 쪽 시내를 좀 더 걷고 싶었지만 마흔세 살의 노총각의 체력은 스무 살 시절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쳐버려서 더 걷기가 많이 힘들었다. 더욱더 펍 탐방을 했어야 했는데 아쉬운 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향했다. 택시밖으로 보이는 더블린의 시내는 참 평화롭고 따사로이 보였다. 택시 안에서 운전기사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인은 가족들과 함께 나이지리아에서 이주를 해왔고 아일랜드에 터를 잡고 살아간다고 했다. 나름 아일랜드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고 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숙소의 캡슐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고 생각해 보니 내가 이 나라에 와서 먹은 주종은 흑맥주가 전부였다.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몇 번 갔던 숙소옆의 허름한 펍에 다시 갔다. 이번에는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라거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보이는가? 저 황금빛 액체가? 저건 덴마크의 자랑 칼스버그였다. 진한 맛이 아주 좋았다. 생맥주로 한국에서는 먹어볼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나는 한잔의 칼스버그를 망설임 없이 마셨다. 저기 보이는 아저씨가 입은 스포츠 티셔츠가 보이는가? 얼핏 보면 축구셔츠 같지만 아일랜드인은 정말 사랑하는 스포츠가 갤릭풋볼과 럭비였다. 아마도 저 아저씨가 입은 셔츠는 럭비셔츠로 기억이 된다. 그렇게 기분 좋게 칼스버그를 즐기고 있는데 옆칸에서 젊은 청년들이 무슨 응원가 같은 것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더블린에 와서 젊은 사람하고는 말을 섞어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화나 할 요랑으로 나는 건너편 청년들에게로 갔다. 그들이 시끄러웠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술이 거나하게 오른 훌리건들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축구의 팬이다. 자국 리그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가 일본축구리그를 본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맥주잔을 들고 옆칸으로 다가서자 나의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그들이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나는 남한이라고 대답했고 그들은 손흥민을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느 팀을 응원하냐고 묻길래 토트넘을 응원한다고 했더니 맨유팬으로 보이는 한 녀석이 갑자기 토트넘을 향해 쌍욕을 박았다. 순간 나는 긴장했고 올곳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셀틱이라는 구단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환장들을 해댔다.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을 셀틱을 마음을 다해 응원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섞여있다. 종교 정치적인 문제가 혼재되어 있고 특히나 친잉글랜드적인 레인저스라는 구단을 증오했다. 그러면서 술이 한참 오른 친구가 카메라를 켜고 녹화기능을 누르고는 나에게 와서 레인져스팀을 욕하는 말을 시켰다. 다들 떡대가 좋은 백인들이라 동의하지 않았다간 유혈사태가 벌어질 거 같아서 레인져스를 욕하는 말을 해줬다. 소심하게 말이다. 그랬더니 그들은 아주 흡족해하며 웃어댔다. 

그리고 몇몇의 사람들이 떠난 뒤, 이번에는 비교적 진중한 이야기들을 했다. 나의 직업과 그들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청년들은 전기공사일을 한다고 했고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사회는 마약이 큰 문젯거리이며 이미 이른 학생의 나이에 성관계를 한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교권이 추락한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나는 우리 고등학교 때 화학선생님 이야기를 해줬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이 떠들거나 숙제를 하지 않거나 당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남자아이들의 고환을 쥐어짰는데 그 이야기를 해줬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일랜드에서 그런 일을 하면 법원에 가야 한단다.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 너희들이 쓰는 아일랜드 영어는 상당히 유니크하고 매력이 있어 한국에 오면 대우를 받을 거고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이 있으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영어강사를 해보라고 했더니 자기는 한국말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렇게 서로의 진중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가 나에게 너는 진짜 내 친구야!라는 말을 하고 떠난 것이 기억이 난다. 

(내가 제일 많이 들렀던 숙소 옆의 낡은 펍)


내가 원하는 여행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아일랜드 유랑기(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