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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Jul 13. 2020

수컷

사나이

여기, 40년 동안 여자 손 한번 제대로 못 잡아본 수컷이 있다. 무려 40년이다. 그 수컷이 합법적으로 이성의 손을 잡는 경우라고는 교회에서 형제, 자매들과 손을 잡고 기도할 때뿐이었다. 그 마저도 오래전인지라 그의 손은 순결 그 자체였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수컷이 이성적으로 매력이 없는 존재라고 인식이 되기 시작한 것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몇 달 동안 같이 앉게 될 짝꿍을 고를 적에 그 수컷은 기피대상 1순위였다. 혹여나 제비뽑기로 여자아이들이 짝꿍을 고를 적에 그 수컷이 당첨되면 그 여자 아이들의 표정은 망연자실... 망국의 한이 그 얼굴에 서려있다는 것을 그 수컷은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참 외모가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던 질풍노도의 시절... 그 수컷의 외모는 면봉과 다름이 없었다. 좁은 어깨 위로 머리 하나... 그런 외모가 이성들에게 호감을 줄 리가 없었다. 밸런타인 데이나 빼빼로 데이 같은 기념일에도 그 수컷은 프리패스였다. 그리고 고교 3년 내내 그 수컷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수컷들의 책상에는 몇 개의 초콜릿 내지는 여러 개의 전리품들이 있었다. 그리고 승자독식의 개념을 가진 수컷의 책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바쳐진 조공처럼 책상이 미어터졌다. 그러나 우리의 그 수컷의 책상은 법정스님의 ‘무소유’ 그 자체였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교과서의 그 말을 몸으로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수컷에게는 꿈이 있었다. 대학에 진학하면 이 상황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할 거라는 꿈 말이다. 왠지 대학에 진학하면 그 순간부터 짠하고 포털이 열리면서 그 포털 너머 여자 친구가 넘어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다. 대학에 가면 여자 친구는 무조건 생긴다는 주변 지인들의 말은 전부 거짓말로 드러났다.
 
수컷의 군대 시절... 간략히 묘사하자면 평소 필력이 좋아 온라인으로 한 여자를 알게 되어 펜팔을 하던 수컷은 사진을 넣어 보내달라는 상대 여성의 간곡한 요구에 응했다가 다시는 답장을 받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를 경험했다. 여자는 수컷의 필력에 속아 아마도 희대의 미남을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성들의 거절이 계속되자 수컷의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회에 나갔을 때 수컷의 마음은 이미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더 이상 상처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에 드는 이성들을 먼저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왕 나를 거절할 것이니 먼저 거절해주겠다는 심산이었다.
 
“너는 살이 참 많이 쪘구나!”
 
얼굴이 굳어지던 상대의 얼굴이 기억난다. 쐐기를 박아야 했다.
 
“허벅지가 정말 굵어!”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처음 본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제법 속이 시원했다.
 
‘어때? 너희들도 내 심정을 알겠지?’
 
그렇게 수컷의 마음속에는 통제할 수 없는 ‘브루스 배너’ 박사가 살기 시작했다. 언제고 그 배너 박사는 헐크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이성들 앞에서...
 
“여드름이 정말 가득하군요! 모공이 정말 커요!”
 
역시 한건 해내고 마는 수컷이었다. 그 이성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마음속에 묘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배너 박사가 자주 출현할수록 수컷은 점점 그리고 더욱더 순결해져만 갔다. 몸에서 사리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끔 노팅힐 같은 영화나 인터넷에서 아름다운 커플의 뉴스를 보면 몹쓸 말을 퍼부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똘똘 뭉친 삐뚤어진 마음으로 우리의 수컷은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분노와 거절감이라는 껍질을 벗기고 벗겨내면 여전히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진흙 속 진주와 같은 그것은 바로 사나이의 ‘순정’이었다. 분노로 쌓여있었지만 사나이 순정마저 의지적으로 없애는 것은 수컷에게 불가능했다.
 
그 순정이 강렬하게 타오를수록 브루스 배너의 헐크는 더 강렬하게 표출되곤 했다. 거세가 된 기분이었다. 더 이상 로맨틱한 감정도 자상함도 그리고 배려도 수컷 안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점점 더 이성을 대하는 방법을 망각해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성에게 감미롭고 따뜻한 말을 건넸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언제든지 마음에 드는 이성이 나타나면 이렇게 고백할 준비를 하고 산다. 흡사 영화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처럼 말이다.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 내가 너 좋아할 수 있잖아?
그래? 안 그래? “
 
마음이 점점 강해지는 수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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