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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Jul 20. 2020

외할아버지는 한량

그래도 그에게 영광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한량이었다. 하루에 세 차례 막걸리를 마셨고 막걸리가 떨어지면 곧장 자전거에 바람을 넣고 동네 구멍가게로 향했다. 외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었다. 아침에 일어나 은빛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세수를 했고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있는 물로 면도를 했다. 아이는 그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퍽이나 멋있다고 여겼다. 아직은 수염이 없어 면도를 하지 못했던 아이는 어른의 면도라는 그 모습이 근사하다고 여겼었다. 아이는 생각했다. 아이도 얼른 자라서 외할아버지처럼 비누로 거품을 내서 얼굴에 발라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하고 싶다고 말이다. 아이의 얼굴에는 아직 솜털조차 제대로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세면을 하고 면도를 한 뒤 마지막으로 꼭 하는 것이 있었다. 틀니를 꺼내어 닦았다. 아직 유치가 남아 흔들흔들거리던 아이는 그렇게 가지런하고 정교한 이를 빼었다가 닦은 후 다시 끼워 넣는 모습이 여간 근사할 수 없었다. 가끔 막걸리가 다 떨어져 자전거를 타기 귀찮을 적에는 외할아버지는 지퍼가 달린 허름한 동전 지갑에서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어 주며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물론 막걸리를 사는 값은 따로 주어졌다. 아이는 그러면 온 힘을 다해 구멍가게로 내달렸다. 막걸리를 산 뒤 또한 자신의 기호에 맞는 과자를 골랐다. 그렇게 한 손에는 막걸리 그리고 한 손에는 과자를 들고 풍성한 마음으로 다시 집으로 달렸다.
 
한량이었던 외할아버지에게 노동이라고 여겨지는 한 가지 일이 있었다. 바로 텃밭을 가꾸는 일이었다. 햇빛이 잘 드는 봄이면 외할아버지는 텃밭을 일궜다. 아이도 외할아버지를 따라 나가 텃밭을 일구는 외할아버지를 지켜보곤 했다. 한 번은 쇠스랑이 신기해서 자기 몸집보다 큰 그것을 가지고 장난친 아이는 그만 자기 발등을 내려치고 말았다. 아이는 비명을 내지르며 울었고 그때 외할아버지가 다가와 쪼그려 앉아서 아이의 신발을 벗겨내고 아이의 발등을 입으로 불며 손으로 재차 문질렀다. 노인의 손이 참 따뜻할 수 있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노인의 손이 포근하고 정말 따뜻했다. 그래서 그 온기가 아이의 울음을 그치도록 몸을 싸고돌았다.
 
평소 평화롭던 아이와 외할아버지가 마찰을 빚는 일은 한 가지 경우였다. 집에 한 대 밖에 없던 흑백 TV를 가지고서 다투는 일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보기와는 다르게 뉴스를 반드시 챙겨보았고 아이는 반드시 만화를 챙겨 보려 했다. 평소 지성인이고 싶어 했던 외할아버지는 하루에 방영되는 모든 뉴스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아이에게 만화를 양보하는 일은 없었다. 때로는 아이가 외할아버지의 몸을 붙잡고 늘어지며 만화를 보고자 악을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온몸을 제압당한 아이는 결국 건넌방으로 넘어가 분한 마음을 삯이며 울어야 했다. 뉴스 시청을 마치고 마주한 외할아버지는 묘한 승리의 웃음을 아이에게 보여주곤 했다.
 
막걸리가 외할아버지를 기분 좋게 만들면 자주는 아니지만 외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의 무용담을 이야기해줬다. 아이가 흥미롭게 몇 번이고 들었던 이야기는 인해전술에 맞서 전투를 벌인 이야기였고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보급로가 차단이 되어 이레를 굶주렸던 이야기였다. 그렇게 가끔 외할아버지는 전쟁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아마도 그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영광인 참전용사라는 정체성을 마음 한구석에 두었다가 가끔씩 꺼내보는 것이 삶의 낙이 아니었나 싶다.
 
아이의 눈에는 외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했고 산처럼 컸다. 가끔 외할아버지의 자전거를 얻어 탈적에 뒤에서 본 외할아버지는 눈에 가득 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산처럼 커지고 외할아버지가 아이처럼 작아져 돌아가셨을 땐 그 커버린 아이는 많은 생각을 했고 또 많이 슬퍼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다 커버린 아이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것이 외할아버지가 즐거워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의 죽음 앞에서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뛰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져 피를 흘리며 서럽게 울며 들어오는 아이에게 했던 말이었다.
 

 
“매일 뜨거워서 못 먹는다고 찬밥을 먹으니까 힘이 없는 거야! 더운밥을 먹어야지!”
 
조롱인지 위로인지 모르는 듯 한 미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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