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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Oct 12. 2020

영원

예수의 부활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접근할 적에 대부분 주관적으로 접근을 한다. 주관적으로 경험한 사건들을 또는 종교에서 경험된 감정들을 주관적으로 습득한 후 그 종교에 입문하곤 한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나 그 주관적인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종교에 대한 접근이 어렵거나 더 나아가서는 거부감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주관적 경험이 없거나 종교에 입문한 사람의 주관적 경험이 그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관적인 경험들이 모든 종교인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또한 아니다. 종교를 접함으로써 오는 감정적 동요는 어느 종교에나 있다. 그리고 기적 같은 것도 어느 종교에서든지 발견되기도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뜻 아래 열심히 구하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낫기도 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보장된 내세를 얻기 위해 그렇게 힘든 고행의 길을 가곤 한다. 내면의 도덕을 쌓고 각각의 종교에서 명하는 죄악과 혈투를 하고 금욕을 한다. 거기서 오는 묘한 만족감 가운데 자신을 충족시키고 자신의 길이 절대적 진리라 믿으며 그 길을 굳건히 간다. 절대적 진리라는 사실을 두고 역사 이래로 모든 인류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절대적 진리라며 목소리를 높이며 싸워왔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종교적은 색채를 배제하고 기적이라는 관점을 배제한 채 객관적인 인간의 시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구전이나 신화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일뿐 객관적인 증거가 있지 않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절대로 죽지 않는 일은 영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만약 그런 일이 역사적으로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종교적인 색채와 기적이라는 색안경을 배제한 채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영원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라지지 않을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이 종교적인 감동과 경험과 학습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더러 극복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자신들의 종교에서 순교라는 것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행동 자체가 영원한 내세를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영원한 것을 손에 확실히 쥐지 않는 이상 영원한 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져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에서 다루고 있는 단 하나의 부활 사건은 예수의 부활뿐이다. 종교적인 색채와 종교적인 색안경을 철저히 배제한 채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마도 가장 이성적으로 영원한 것에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마음이 향하게 되어있고 마음에 가득한 것을 사람의 입으로 말한다. 곧 그 말이 그 사람이다. 물질적인 것을 지극히 원한다면 그 사람은 물질적인 것을 입으로 가득히 말한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의 가치관이 이전에 사랑하던 가치관보다 더 우월한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의 마음은 그곳으로 향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우월한 가치를 마음에 담고 그것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것을 정말로 본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종교적 색채와 기적적인 색안경을 배제한 채 그 영원한 것을 본다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담기게 되고 그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조심스레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종교적인 색채와 기적적인 색안경을 철저히 배제한 채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예수의 부활은 사실인가? 만약 그 부활이 절대적인 사실이라면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은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된다. 정말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믿을만한 이유를 이야기해보자면 그 예수의 부활을 보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증명했던 제자들이 전부 그것 때문에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전파하다가 죽어버렸다. 세상 제일의 가치인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그것 때문에 버렸다. 여기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제자들은 종교적인 학습으로 내세를 위해 자기 생명을 도박하듯 베팅을 한 것이 아니었고 영원한 것을 실제로 봐버린 것이었다. 절대적이고 확고하고 의미 있는 가치가 아니라면 생명을 내어버릴 수 없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어떠한 가치보다 더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위에 말 한대로 좀 더 우월한 가치를 사람은 마음에 담고 말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이 눈앞에 손에 잡히듯이 쥐어지지 않는다면 자기의 생명을 그 절대적 가치를 위해 버릴 수가 없다. 12명 중 12명의 예수의 제자들 전부가 그것 때문에 생명을 걸었다. 그들의 죽음으로 사실을 입증한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오랜 종교적 학습의 과정도 아니었고 감정적인 동요가 오랜 세월 지속되어 그들이 생명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죽지 아니하는 것을 봐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영원한 절대자가 있다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보다 절대적인 가치나 의미가 있었다면 절대자를 그것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절대자임을 나타냈을 것이다.) 이로서 인류에게 두 가지 사실이 입증이 되었다. 죽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과 절대자가 있다는 것 말이다.


성경은 그것에 대한 기록이다. (절대자가 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군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누가복음 1장 2절-


사람들은 알고 있다 성경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기록된 책이라는 것을 말이다. 종교적 경전의 개념 접근 이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록된 책을 말한다. 기록을 시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실존하는 사람인 것이며 그 실존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한 몸을 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태초의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온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 전능자 하나님을 곧 한 분이신 여호와라고 말하며 그 여호와가 친히 사람 되신 분이 예수임을 전한다. 성경은 거시적으로 전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부활 사건을 통해 입증이 된다. 기독교인이 되라고 의미 없이 우기듯 강요하여 초대하지는 않으려 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고 구글에 접속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실 여부를 따져 보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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