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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Nov 12. 2020

선짓국

황금광 시대

“할머니! 이게 무슨 국이야?”
 
“고깃국이야! 그냥 먹어!”
 
7살이었던 내가 아무리 봐도 고깃국이 아닌 게 분명했고, 그 고깃국에는 고기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말한 그 고깃국에는 고기가 없었고 검분 홍의 덩어리만 보일뿐이었다. 7살의 나는 용기를 내어 그 덩어리를 베어 물었다. 물컹거리면서 쫄깃했다. 그리고 느껴지는 따뜻한 식감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7살의 나는 그것을 또 다른 종류의 고기로 한동안 여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고기가 아니었다. 소의 피, 즉 선지였다. 고기를 자주 먹을 수 없던 우리 가정은 고기 대신 선지를 먹었었고 7살의 나는 어느 날 선지를 처음 마주했던 것이다. 선짓국의 맛은 정말 달았다. 평소 고기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던 7살의 나는 고기를 자주 먹진 못했지만 고기와 그 비슷한 어딘가에 닿아있는 선지를 종종 먹곤 했다.
 
‘쳇! 고기를 못 먹고 이런 이상한 것이나 먹다니!’라는 불평의 마음은 내 속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선지가 나의 입안에서 활발하게 으깨지는 순간 7살의 나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것은 내 입속에서 때로는 맛있는 삼겹살이 되었고 했고 때로는 불고기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절망하지 않고 상상을 통해 온갖 진귀한 고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장 만나고 싶었던 것은 로스구이 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햄을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햄은 미지의 그곳 어디쯤이었다. 하지만 선지로 육류를 대신하던 시절에 어찌 7살 아이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하는 로스구이 햄을 만날 수 있었을까? 하지만 7살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빈곤 속에서 풍요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채플린의 영화 황금광 시대를 보면 주인공 떠돌이가 도저히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자신의 구두를 삶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시절 그 장면을 통해 보았던 채플린의 모습은 그 지독한 빈곤 속에서 세상의 진미를 먹는 듯 구두를 먹었다. 구두의 가죽과 밑창은 일품의 고기였고 구두의 끈은 최고의 면 요리였다. 나는 그때 채플린의 마음속에서 짓밟거나 부정한다 해서 사라지지 않는 풍요를 보았다. 어린 나의 눈에는 채플린의 그 구두의 맛이 너무나도 궁금했고 또한 부러웠다.
 
그렇게 7살의 내가 8살의 내가 되고 9살의 내가 되면서 여러 종류의 고기들은 내 삶을 좀 더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를 잔뜩 설레게 했던 고기들의 맛은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난 그 순간 선지가 더 그리웠고 더 먹고 싶었다. 그랬다. 어쩌면 내가 바라고 그리웠던 것은 고기들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짓밟거나 부정한다고 사라지지 않는 풍요로운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더 의미 있고 더 지극했다. 나의 7살 어린아이에 마음속에 있는 빈곤과 불행을 오히려 부정하는 그 풍요로운 마음이 간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던 상상력!
 
그런 것이 많았다. 돼지의 간을 삶아 요리한 것도 고기였고 돼지의 허파를 삶아 요리한 것도 7살의 나에게는 고기였다. 빈곤함이 주는 풍성을 그때 나는 알아버렸고 그 풍성을 부정하거나 짓밟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배워버렸다. 손아귀에 힘이 있는 한 그때 배운 것을 꼭 움켜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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