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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Feb 04. 2021

정복자 피터

공감과 유대감

피터는 가난했다. 나 역시 가난했다. 그렇지만 피터는 더 가난했다. 나의 유년의 기억을 의존해 보자면 나는 도시락 정도는 빼놓지 않고 먹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피터는 1개의 도시락으로 피터의 형과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던 기억이 난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하던 피터의 형이 피터의 손에 들려있던 도시락 가방을 낚아채며 ‘이것은 나의 것이며 내 차례의 도시락’이라며 피터에게 윽박을 지르며 도시락을 자전거에 실은 채로 유유히 떠나던 기억이 난다. 억울하며 분노하여 얼굴이 붉어졌지만 피터는 분을 삯이며 그렇게 형에게 도시락을 어쩔 수 없이 건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피터는 가난했다. 피터는 1980년생 원숭이 띠였고 난 1981년생 닭띠였다. 그렇지만 피터는 가정의 사정으로 인해 학교를 두 학년 늦게 입학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런 저항 없이 피터는 나와 내 친구들에게 형이라 불렀다. 피터의 머리에는 이가 있었으며 항상 먹지 못해 수척했고 눈에는 약간의 황달까지 있었다.
 
그런 피터를 나와 내 친구들은 사랑했고 가까이했다. 그런 피터가 가끔 바지를 입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난 억지로 웃음을 참고는 했다. 이유는 피터의 바지는 때때로 발목의 복숭아뼈가 다 보이도록 통이 좁고 짧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꽉 끼는 바지를 입은 채로 피터는 아무 거리낌 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으며 우리와 활기차게 놀기도 했다.
 
하루는 피터의 벽돌공장에 놀러 갔었다. 피터의 아버지는 벽돌공장을 운영했다. 운영했다기보다 아마 가장 높은 관리인이었을 것이다. 인부들을 위한 간식시간이 다가오면 피터는 ‘사발면’을 준비하곤 했다. 탐스러워 보이는 ‘사발면’ 박스가 피터네 생활하는 건물의 주방에 놓여있었다. 라면이 매우 진귀하던 시절이었다. 나에게는 말이다. 라면을 한 번 먹으려 치면 적어도 나에게는 그 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진귀한 라면을 피터는 물을 끓여가며 준비하고 있었다. 피터는 먹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가며 라면을 준비했다. 라면 박스가 놓여있었지만 그중에 피터의 몫은 없었다. 물이 끓여지는 소리 가운데 피터는 자신의 몫이 없음을 재차 확인하고 라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끓인 물을 넣기 전의 아직 단단한 인부들의 라면을 손으로 떼어먹기 시작했다. 10개 정도 놓여있었으니 지우개 크기만큼만 떼어먹어도 요기는 될 성싶었다. 피터는 몇 번 라면을 떼어먹더니 나에게도 수프를 바른 조각을 권했다. 나는 그 달콤한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다.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댔다. 그런 방식으로 간식을 스스로에게 조달할 만큼 피터의 형편은 가난했다.
 
1991년의 초겨울 즈음이었다. 반에서 가난하게 사는 아이들을 조사하게 시작했다. 그것을 조사하는 사람들은 담임선생님과 반장 아이였고 그들의 조사 대상인 나와 반 친구들은 금세 그들의 눈 안에 들게 되었다. 유년의 기억을 의존해 보자면 학교에서 이례적으로 자선행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자선의 대상은 나와 반의 몇몇 친구들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나와 내 친구들을 모아 학교의 어느 점잖아 보이는 공간으로 데려갔다. 멋진 소파들이 놓여있었고 근사한 커튼들이 쳐져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판단하는 학교의 모든 가난한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남자아이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무리를 지어 친한 아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무슨 일이 생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혼자 온 아이들은 말 붙일 곳이 없어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무리 안에는 ‘피터’도 있었다. 마을이 아닌 학교에서 사적으로 만난 피터는 더욱더 반가웠다. 피터와 나는 서로 몸을 밀치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고 서로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하지만 이내 그곳을 담당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지적을 당해 즐거운 장난을 그만둬야만 했다. 잠시 후 학교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어른들이 큰 박스를 몇 개 들고 그곳으로 들어왔다. 무거운 박스를 들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호흡이 기억이 난다. 일렬로 그 박스를 놓고 아이들 앞에서 그 박스를 펼쳤다. ‘옷’이었다. 정확히 말해 겨울용 점퍼였고 보라색과 형광색의 그것이었다. 슬쩍 만져보니 솜으로 된 점퍼였던 것이다. 이내 머릿속에 계산이 들기 시작했다. ‘저것은 나와 피터의 것이 곧 되겠구나!’라는 생각 말이다. 일렬로 박스를 놓아둔 이유는 사이즈 별로 구분을 해둔 것이었고 그곳을 담당하던 선생님들은 우리들을 몸의 크기에 맞게 그 박스 앞으로 세웠다. 색의 구분이 없이 그 점퍼가 사이즈대로 남자와 여자아이에게 지급이 되었다. 그리고 다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그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내 그곳은 다시 한번 왁자지껄하는 소리로 차기 시작했고 그것은 분명히 행복한 기운임이 틀림없었다. 피터는 형광색의 점퍼를 지급받았고 나는 보라색의 점퍼를 지급받았다. 그렇게 풍성한 마음... 즉, 무언가를 노력 없이 풍성히 소유를 했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각자의 학급으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나 학교에서는 같은 종류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 눈에 제법 띄었다. 그리고 나와 그들 스스로들은 ‘우리가 왜 이 옷을 지급받고 입고 다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이 만약 부끄러움이 되었다면 학교에서 보여지는 그 보라색과 형광색의 옷의 수는 점점 줄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난 열심히 만족을 느끼며 따뜻하게 그 보라색 점퍼를 입었고 피터 또한 어디를 가든 그 점퍼와 함께였다. 가끔 읍내를 나가면 멀리서 그 점퍼를 입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발견하곤 했다. 우리는 멀리서 서로의 눈길을 교감하며 묘한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했다.
 
‘너도? 나도!’
 
계절이 그렇게 지나고 겨울이 봄을 맞을 때 즈음 나는 그 옷을 세탁하여 옷장으로 넣었다. 하지만 피터는 봄이 이미 와 버리고 추위가 완전히 가신 다음에도 그 옷과 함께 했다. 그리고 피터는 겨울 내내 그 옷을 단 한 번도 세탁하지 않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가난한 만큼 피터의 옷은 훨씬 누추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억을 마지막으로 의존해 보자면 그때 가난은 나와 피터와 그 옷을 입었던 아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정복하지 못했다. 우리의 겨울은 그 옷을 입고 가난과 결핍을 정복했던 겨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난이라는 것을 정복해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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