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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Apr 22. 2021

진통제

내 마음의 보석

짝사랑하는 여학생에게 다른 녀석이 쓴 편지를 배달한 적이 있었다.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수치스러움이 더 편했다. 나는 몸이 왜소했고 약했다. 변성기가 제대로 찾아오지 않은 고등학생이었으니 말이다. 그 편지를 배달하는 것을 거절했노라면 수치스러움보다 더 큰 공포감이 나의 몸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비겁했다.

 

내가 짝사랑했던 여학생은 꽤나 예뻤다. 흰 우유를 접시에 가득 따르고 그 위에 딸기를 띄워 놓은 것 같은 얼굴과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색은 예쁜 흰색과 예쁜 빨간색이 전부였다. 나도 예쁜 여자를 보면 가슴이 꿈틀거리는 남자였기에 모두가 짝사랑했던 그 여학생을 나도 또한 짝사랑했었다. 꿈에도 몇 번 나왔었다. 그 시절의 그렇게 간절히 도 그 여학생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나의 삶은 비루했고 초라했다. 이유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로부터 온 폭력이었다. 콰지모도와 같은 외모와 작은 키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와 늘 구부정한 모습은 호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비가 온 뒤 맑은 날... 길 위에 있는 숨이 끊기기 싫어 발버둥 치는 지렁이처럼 밟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숨이 끊기지도 못하고 밟히고 밟히는 삶을 긴 시간 살아야 했다. 차라리 숨이 끊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운명은 잔인하게도 급우들의 폭력의 그늘 앞에 나를 매일이고 마주 세웠다. 다행히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그 여학생을 생각하면 웃을 만했다. 내장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급우들의 주먹으로 인해 파고들어도 마음에 그 아이를 떠올리면 비참한 내 모습 가운데서도 내 존재가 의미가 있었다. 비참한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 나를 의미 있게 했다. 그렇게 그 아이로 인해 난 반짝거리며 빛나는 보석이 되곤 했다. 날 짓밟고 넘어뜨리려는 파도가 나를 하루에 수십 번을 덮어도 그때마다 그 설렌 마음을 꺼내어 보며 난 나를 보석으로 만들었다. 행복했다.

 

그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무리 가운데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아이도 있었다. 그 녀석 또한 그 여자아이를 떠올리며 행복해했다. 불쾌했다. 그런 더러운 녀석이 그녀로 삶을 만족한다는 것이 지극히도 싫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녀석을 심판해 줄 힘이 없었다. 그저 마음만 그렇게 분노로 이글거리며 타올랐을 뿐이고 다른 의미로는 질투였다. 아무 힘없는 질투 말이다.

 

다행히도 그 여자아이와는 대화를 하며 지낼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대화를 하며 지낼 수 있는 무리 안에는 들어있었다. 대화로도 좋았다. 더 큰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 대화만 있어도 삶의 이런저런 모습의 고통은 충분하고도 남게 씻겨져 내려갔다. 때로는 삶에 더 큰 진통을 마주할 적마다 그 대화를 진통제 삼아 그 순간들과 고비들을 넘기기도 했다. 그 하나 때문에 18살의 나는 견딜 만했다. 견딜만한 것이 곧 행복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곧 그 견딜만함도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그 여자아이를 짝사랑하던 그 녀석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그 녀석은 내 그 여자 아이와 대화를 하고 지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난 그 사실을 그 녀석이 모르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그 여자 아이의 눈앞에서 전달할 용기가 없었던 나머지 그 전달하는 역할을 내가 해주길 바랐다. 아니다. 내가 해야만 했다. 난 그것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고 거절을 하면 기약 없는 고통과 마주해야 했기에 난 두려웠다.

 

햇빛이 아주 맑고 청명하게 내려 쬐던 초여름이었다. 코끝으로 들어오는 여름의 향기가 밉도록 달콤하던 여름이었다. 난 그 녀석이 내손에 들려준 편지를 들고 그 여자 아이를 향해 저벅거리며 걸었다. 손끝에서는 땀이 났다. 비겁하고 또 비겁했다. 이제 그 편지를 전달하면 난 다시는 나를 고통에서 구원해줄 진통제는 영영 안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아쉬움보다 당장에 그 녀석으로부터 오는 주먹의 아픔의 두려움이 더 컸다. 그래서 난 그 두려움의 용기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편지를 들고 그 여자아이에게 용기 내어 걸었다. 멀리서 그 아이가 보였고 그 아이를 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한 번도 용기 있게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맞기 싫은 두려움으로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을 용기 있게 불렀다. 그렇게 편지를 전달하면 진통제는 영원히 안녕이었다.

 


 

“S야!”

 

용기 내어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 아이는 내손에 있는 편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고 웃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상냥하고 따뜻한 그리고 호기심 어린 미소였다. 편지만 전달하면 순간의 폭력은 피할 수 있었지만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꺼내보는 아름다운 보석은 영원히 팔아버리는 행동이었다.

 

“..... 이 편지! 너 Y 알지? 그 애가 너한테 주라고 해서... 난 전달만 해주는 거야!”

 

천진난만하던 웃음이 사라지던  아이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리고     마음의 보석을 순간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영원히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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