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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Mar 30. 2021

노인의 세월

의지를 발휘하여!

노인의 세상을 부러워 한 적 있다. 그때 나의 나이는 7살이었고 지극히도 노인들의 세상을 부러워했다. 이유는 그랬다. 이미 거의 다 살아버린 세월을 놓아버리고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지극히도 부러웠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 의무도 없었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압박감이나 부담감도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치 마라톤을 다 끝내고 나서 이제는 주어지는 안정감만을 누려야 하는 선수들처럼 그들의 넉넉함이 지극히도 부러웠다. 안방에 앉아서 벽지가 노래지도록 담배를 피웠던 외할아버지를 기억해본다. 그 외할아버지의 눈빛 속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비록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 같은 것들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의지를 초월한 여유가 가득했다. 그 눈빛을 나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 힘든지 7살의 나는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압박감을 7살의 나이부터 이미 느끼기 시작했다. 한글을 배워야 했다. 한글을 배워야 하는 부담감은 이만 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읽고 외워야 했다. 혹여나 제대로 읽지 못하면 바보가 되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9살의 나이가 되도록 나는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헤맸다. 받침이 복잡한 글자들은 나를 더욱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9살에도 여전히 글을 제대로 읽을 줄 몰랐던 나는 나 스스로를 바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나 자신을 바보라는 정체성을 부여함이 그리 큰 무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유년의 기억은 나에게는 치열했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배워야만 했고 어른들이 요구하는 어린이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항상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가끔 또래들끼리 모여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의 가면을 벗어던져 버리고 너절하고 누추한 우리들의 모습을 서로 가감 없이 보일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렇게도 어린이의 삶은 피곤했다.

 

그 피곤함에 매번 지칠 적에는 외할아버지의 눈빛을 조용히 바라보곤 했다. 그 고요하기만 했던 눈빛과 모든 것을 놔버릴 수 있는 노인의 넉넉한 특권을 나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당장 한글을 읽기 위해 피눈물을 쏟는 고통을 마주할 할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했고 학교 선생들을 포함한 어른들에게 그들의 만족할만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며 노력할 필요도 없는 모든 것을 초연한... 세월을 다 살아버린 그 특권이 정말 간절했다. 그렇게 어린이의 부담감을 마주하고 싸워가며 나는 자라 갔다. 성장해 나가는 것을 매 순간 동경하고 갈망했다. 성장해 갈수록 나이에서 오는 압박감이란 것이 사라져 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성장해 갈수록 압박감은 커졌고 다만 내 마음이 그 압박감을 느끼는 것을 둔감하게 느껴갈 뿐이었다. 그게 성장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청년의 모습... 그 어른대로의 부담감이 나에게는 있었다. 결국 그 부담감의  추격에 쫓겨 청년의 세월과 안녕을 하고 이제는 중년의 시간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긴다. 그 환영하는 미소를 반기지 못할 만큼 내 마음은 둔감해져 버렸다. 이젠 나의 외할아버지가 진정 어떤 것을 초월해왔고 어찌하여 그 눈빛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노인은 그것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나간 길을 그도 의연히 지나갔고 내가 겪었던 압박감을 그도 역시 겪었다. 어쩌면 그때 그의 눈빛 속에서의 의연함의 크기만큼이나 더 모진 풍파를 겪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얼마의 세월이 지나 이 압박을 이겨내어 벗어던져 버리면 그 눈빛을 가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여기 나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악착같이 살아내려 한다. 언젠가 나의 초연의 눈빛을 누군가 동경하도록 살아내고 또 살아낼 것이다. 그래서 나를 압박하고 숨 막히게 하여 결국 아무 감정도 느끼게 못하는 이 상황들과 또 싸우고 싸워 살아내고 이겨낼 것이다. 이제 곧 중년이 되어 마음이 흩어져 파편이 되어버려도 버티고 이 자리에 서있을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 내 눈 안으로 초연함이 들어온다면 그동안 굳어져 망가졌던 내 마음의 감정들을 다시 살려내고 호흡을 넣어 그 눈빛을 나의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또 자랑할 것이다.

 


 

비록 우리의 힘이 옛날처럼 하늘과 땅을 뒤흔들 수는 없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우리다, 모두 하나같이 영웅의 기개를 가진 우리는, 우리는 시간과 운명에 어쩔  없이 약해 하여도 강력한 의지로 싸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겠도다.

 

오늘따라 테니슨의 시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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