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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Feb 07. 2022

깡패 생활

기지 바지

사람들은 그것을 ‘생활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내가 중학생 때였으니까 1995년에서 1996 즈음 사용되던 단어였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 ‘생활이라는 단어의 뜻은 건달 혹은 조직폭력배가 되어  조직의 일원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했다. 당시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대한민국을 휩쓸고  직후라 깡패라는 직업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막연한 동경을 주었고 학교에서 힘을 깨나 쓰며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직업군으로 작용이 되어서 학생으로서의 삶을 더욱더 게을리하는 촉매가 되곤 했다.  번은  친구 캘빈(Calvin) 학급의 불량 학우들에게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캘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성년이  그의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소식을 알아챈 불량학생들은 캘빈을 겁박하며 이렇게 물었다.

 

“뭐? 너희 형에게 일렀다고? 너희 형 생활하냐?”

 

캘빈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국어사전의 ‘생활’의 뜻으로만 이해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불량 학우들은 얼굴이 굳어지며 온몸이 경직되었다. 장차 자신들이 조직사회에서 형님으로 모시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동생을 괴롭힌 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캘빈의 형은 불량 학우들이 말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마땅한 직업이 없이 집에서 쉬는 생활을 한 것이었다. 어쨌든 성년이었던 형의 개입으로 캘빈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학교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폭력이 하나의 존재감과 언어와 권력이 된 작은 사회가 바로 학교였으니 말이다.

 

불량 학우들이 즐겨 입는 옷이 있었다. 바로 ‘기지 바지’였다. 학교에서 입는 교복 바지는 입지 않았고 그들은 얼른 어른이 되고 싶고 또한 폭력배가 되고 싶어서 폭력배들이 입는 기지 바지를 입곤 했다. 상의는 교복 재킷을 입고 그 안에는 중년의 아저씨들이 입는 골프 웨어를 맞춰 입고 바지는 교복 색의 신사 바지를 반드시 챙겨 입었다. 그래야만 조직폭력배처럼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꿈을 꾸던 불량 학우들은 실제 연이 닿아서 ‘호박’이니 ‘국빈관’이니 하는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폭력배의 밑으로 들어가 조직원의 꿈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이 워낙 시골이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처럼 세력 다툼이나 다른 지역 폭력배들과의 전쟁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진상 손님이나 일수 돈을 받으러 다니는 일이 전부였다. 그리고 15살이나 16살에 조직원이 된 불량 학우들은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가있을 시간에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비디오방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세월 속에서 내가 불량 학우들에게 부러웠던 단 한 가지는 비디오 방에서 어른들이나 보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마음껏 본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 폭력배가 된 불량 학우들 중 아주 소수는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아이도 있었다. 아직 코에 수염도 나지 않은 어린이 같은 학우들도 폭력배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꿈과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깡다구를 소유한 이유로 간혹 조직원이 되는 일이 있곤 했다. 아동복을 입어도 될 외모의 아이들이 골프웨어와 기지 바지를 몸에 맞게 수선집에서 줄여 입고 오락실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동전을 빼앗을 일을 간혹 보던 나는 그들의 눈에 띠지 않게 웃음을 짓곤 했다. 그렇게도 인류에게 해악과도 같은 폭력이 어떤 학우들에게는 간절한 꿈이 되곤 했다. 그것이 그렇게도 난 웃겼다. 그리고 폭력배가 된 불량 학우들이 자신의 선배를 부를 적에는 절대 짧게 그들을 부르는 일은 없었다. 교육을 철저히 받은 그들의 호칭은 ‘형님’이었다. 자기보다 1살이 많건 2살이 많건 무조건 형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한 번은 오락실에서 전투기 게임을 하던 15살의 조직원이 손가락이 닳도록 버튼을 눌러도 적이 사그라들 기세가 보이지 않자 변성기가 지나지도 않은 목소리로 옆에서 구경하던 다른 조직원에게 외쳐댔다.

 


 

“형님! 도와주십시오!”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조직원은 얼른 의협심을 발휘하여 동전을 투입하고 멋진 전투기를 소환하여 자기 조직원을 사력을 다해 도왔다. 그렇게도 폭력은 그들에게 꿈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때를 투영하여 생각해 보자면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무언가 들이 과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간절하고 아름다운 꿈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과연 그런 것들을 꿈꾸고 있을까? 다만 소망한다. 다가올 세계에서는 인류에게 절대적 혹은 작은 모습의 악이라도 누군가에 꿈이 되지 않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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