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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파노 Jul 05. 2023

침묵

나를 도우소서!

윌리(Willie)는 중의 아들이었다. 중이 무슨 자식이냐? 하겠지만 태고종이라는 종파의 스님들은 결혼을 할 수 있었고 자식을 낳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윌리는 중의 아들이었다. 또한 윌리는 상당히 유복했다. 기억을 의존해 보자면 그 녀석의 축구화는 ‘디아도라’였고 가방은 ‘이스트 팩’이었다.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할 적에는 그냥 운동화만 신고 차기에도 만족스러웠는데 윌리는 나이키보다 비쌌던 디아도라를 반드시 챙겨 와 축구를 즐기곤 했다. 물론 평소 신는 신발은 나이키였음이 틀림없다. 도시락을 먹을 때에도 윌리의 반찬들은 늘 최고였다. 비엔나 소시지와 탕수육 그리고 잡채 같은 것이 항상 앙상블을 이루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윌리에 손목에 차고 다니던 염주였다. 그것은 나무로 된 염주가 아니었다. 크리스털이었다. 그리고 아이돌 가수들이 한참 히트를 칠 무렵 윌리는 카세트테이프가 아닌 CD를 무조건적으로 구매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테가 났고 더욱이 내가 늘 하던 돈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분기별 수업료를 낼 때면 마감일을 임박하거나 마감일을 넘겨 겨우 마련해 수업료를 납부했던 나와는 달리 윌리는 한 치의 미룸도 없이 재깍재깍 수업료를 납부했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기독교인이었다. 고1 즈음 무렵 반복되는 학교폭력으로 인해 강박증이 극에 달했고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강박사고가 떠오르면 안정감을 찾기 위해 상쇄행동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데 하루 종일 수업시간에 그것을 하느라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성적은 바닥을 기었고 집안의 가세는 늘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한 나의 초라한 모습 덕에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녀석들은 나의 정신과 육체를 마음껏 유린했다. 내일이 오고 또 그다음 날이 와도 삶은 나에게 지옥이었다. 그리고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이 지옥이 고등학교 졸업이나 돼야 끝난다는 사실이 17살의 나를 절망하게 했다. 청소년의 나이에 기독교에 꽤나 진지했던 나는 내가 믿는 전능자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분의 존재여부가 아니라 그분의 태도에 대한 실망이었다.

 

‘극악의 나의 고통을 왜 바라만 보고 계시지?’

 

그 의문은 전능자를 향한 극한의 분노와 미움으로 변해갔다. 내가 기독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내가 겪는 이 고난의 주인은 윌리의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이방종교를 믿는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윌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따르는 불교신자들의 막대한 돈을 통해 삶의 유복함을 누렸고 걱정도 근심도 괴롭힘과 폭력도 없었다. 그에 반해 기독교를 향해 진심이었던 나는 내가 매일 겪는 생살을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 고난이 매일매일 계속됐다.

그리고 기독교가 나에게 약속했던 기독교 최대의 수혜인 ‘평안’조차도 누릴 수 없었다. 평안은 고사하고 언제 폭력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에 떨었고 폭력배들의 심부름에 마음은 항상 바빴으며 밥조차도 마음 놓고 먹지 못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어쩌다 윌리와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착하고 마음이 여유롭기까지 했던 윌리는 폭력배들과 달리 여유롭고 온화함 미소를 나에게 보이곤 했다. 마치 부처님처럼 말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로 다 쓰러져버린 내 마음의 벽을 다시 세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가끔 생각한다. 적어도 그때 우리 집이 유복하지는 않더라도 나에게 정신적 고통과 폭력과 같은 고통이 없었다면 나의 삶이 어떻게 변했을까? 하고 말이다. 아마도 넌지시 짐작해 보지만 지금보다는 윤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그리고 전능자에게 묻고 또 묻는 삶을 오랫동안 살고 있다.

 


 

‘내가 왜 그런 일들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그때 나를 안 돕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혹자는 과거는 잊으며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들의 말일뿐이다. 내 허물어져버린 마음의 벽은 결코 재건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날들이 두려우며 여전히 그 녀석들이 증오스럽다. 그렇지만 나와 전능자의 연결된 고리를 결코 끊을 수 없는 이유는 언젠가 전능자의 시간이 되었을 때 그로부터 내 삶의 고통에 대한 답변을 듣기 위해 이고리를 결코 끊을 수가 없다. 여전히 기독교 안에 머물며 애통하고 슬퍼하며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 발버둥 치고 이 바운더리 안에 있는 이유는 언젠가 그로부터 성경의 기자들의 그의 뜻을 알게 되어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날을 기다리며 나의 고난의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고 원망하며 마음껏 소리칠 것이다. 그렇게 고함을 치며 그에게 붙어있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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