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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은 미궁, 그 주인은?

by 야담

1. 신화 이야기




▪︎ 파시파에



파시파에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로 크레타의 미노스 왕과 결혼했다. 미노스는 신 포세이돈과의 약속을 어기고 신이 바친 황소를 희생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벌로 포세이돈은 파시파에가 그 황소에게 욕망을 느끼도록 만든다. 파시파에는 다이달로스에게 나무로 된 암소 틀을 제작하게 해 그 안에 들어가 황소와 교합하고 그 결과로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미노타우로스는 황소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가진 존재였고 결국 미궁 속에 갇혀 살아가게 된다.



▪︎ 판



판은 헤르메스와 암염소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수의 존재로 염소의 다리와 뿔을 지녔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며 자연의 정기를 상징한다. 숲과 목장의 신으로 야생성과 생식력, 자유로움을 상징하며 지나치게 인간을 놀라게 한 탓에 패닉(panic)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그는 문명의 경계를 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운 존재로 숭배되었지만 동시에 예측 불가능하고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




2. 신화와 문학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본래 괴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지식인의 탐구욕에서 태어난 생명이며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버려진 존재다. 인간 사회에 다가가려 노력하지만 외모로 인해 혐오와 폭력을 당하며 결국 인간에 대한 복수심을 품게 된다. 그는 자신을 만든 자에게 묻는다. "나는 당신의 아들입니까, 당신의 저주입니까?" 괴물은 사회의 수용 실패가 낳은 비극이며 미노타우로스와 마찬가지로 타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타자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는 도덕적 인격과 충동적 본능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그러나 하이드는 억눌렸던 욕망과 폭력성의 표출로 나타나며 점차 지킬을 잠식한다. 결국 지킬은 스스로를 죽이는 것으로 이 파국을 마감한다. 이 작품은 문명이 억누른 본능이 어떻게 괴물화되어 돌아오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이드는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와 같이 사회가 수용하지 못한 본능의 그림자이다.




3. 각국의 신화




이집트의 세크메트는 태양신 라가 인간의 불경을 벌하기 위해 보낸 파괴의 여신이다. 사자의 머리를 지닌 그녀는 전염병과 전쟁, 복수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치유의 능력도 갖고 있다. 그녀는 이집트 문명이 자연의 파괴성과 치유력을 동시에 어떻게 신격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존재로, 한계를 넘은 자연의 분노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말해준다.



힌두교의 가네샤는 여신 파르바티가 흙으로 만든 아이의 머리가 잘려 나간 후 코끼리의 머리를 붙여 살린 존재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코끼리의 머리를 하고 있지만 그는 지혜와 시작의 신으로 존경받는다. 이처럼 외형의 이질성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인정과 역할의 전환을 통해 수용될 수 있는 가능성임을 인도 신화는 보여준다.



북유럽 신화의 펜리르는 로키와 거인 앙르보다 사이에서 태어난 늑대 괴물로 신들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다. 신들은 그를 감금하기 위해 속임수로 사슬을 채우고 입에 칼을 물려 봉쇄한다. 그러나 예언에 따르면 그는 언젠가 탈출하여 오딘을 죽이고 라그나로크(신들의 황혼)를 불러온다. 펜리르는 억눌린 자연의 파괴성과 그것을 두려워한 신들의 통제 욕망이 만든 결과를 상징한다.



일본 신화의 이누가미는 인간과 개의 영혼이 결합해 만들어진 일본의 영적 존재이다. 주로 주술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충성과 복수라는 이중적 상징을 지닌다. 인간이 자연의 생명력을 통제하고자 할 때 그것이 어떤 윤리적 위반과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준다. 이누가미는 단순한 귀신이 아니라 인간의 통제 욕망이 만들어낸 의도된 타자이다.




4. 고찰 : 문명은 왜 괴물을 만들고 괴물이라 물렀는가




판과 미노타우로스는 같은 출처를 가졌다. 둘 다 신과 짐승의 결합, 즉 문명과 자연이 섞여 나온 존재들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판은 자유로운 들판과 숲의 신으로 남았고 미노타우로스는 미궁에 갇혀 괴물로 살다 죽었다. 이 차이는 외형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순수하게 문명이 이 두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다뤘는지에 따른 결과다. 즉, 괴물이 된 것은 그 존재 자체 때문이 아니라 문명이 감당하지 못한 존재를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문명은 예외를 수용하지 않는다. 문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고 질서를 위해서는 경계와 반복이 요구된다. 자연은 그 반대이다. 끊임없이 넘치고 흐르며 예측되지 않는다. 그래서 문명은 자연을 두려워한다. 파시파에와 황소의 결합은 문명으로선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의 산물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감싸 안는 대신 감금하고 억제하고 희생양으로 삼았다. 미노타우로스는 단지 그렇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문명이 그렇게 기능하게 만든 존재다.



그를 가둔 미궁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구조 자체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공간적으로 격리하고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방식. 도시의 질서는 겉으로는 깔끔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늘 하나의 미궁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미궁 안에는 항상 누군가가 갇혀 있다. 정체불명의 존재, 수용되지 못한 타자, 경계를 넘은 충동의 결과. 사회는 괴물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물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괴물을 통해 문명은 자기 정당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괴물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서 괴물은 필요하다.



판은 이 경계를 넘지 않는다. 그는 문명의 바깥에서 자유를 누린다. 그가 미궁에 갇히지 않은 이유는 그가 문명의 핵심을 위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은 경계 밖에 머무는 자유였고 미노타우로스는 경계 안에 들어온 위험이었다. 그래서 하나는 신이 되었고 하나는 괴물이 되었다. 결국 자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문명이 그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느냐가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이 구조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괴물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괴물을 만들어내는 구조는 여전히 작동 중이다. 사회는 여전히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 비정상을 정의하고 경계 바깥에 새로운 미궁을 세운다. 이 미궁은 장애, 성적 지향, 이민자, 비국가, 비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변형된다. 괴물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우리가 정의하고 우리가 배제하며 우리가 죽이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진짜 윤리는 무엇인가? 금기를 넘는 사랑이 나쁜가? 황소와의 결합이 괴물인가? 아니다. 윤리란 금기를 넘은 뒤 그 결과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파시파에의 사랑은 단지 금기였다. 그러나 미노타우로스를 미궁에 가두고 인간을 먹이로 던지고 끝내 죽인 건 사회다. 이건 사랑의 잘못이 아니라 사랑의 결과를 처리하지 못한 문명의 책임이다.



결국 괴물은 사회가 만들어낸다. 그 괴물은 늘 경계에 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 손으로 만들어진다. 신화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괴물은 자연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괴물은 우리가 정한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이며 그 규칙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괴물의 형상을 통해 반사적으로 드러내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판의 자유를 경외하고 미노타우로스를 혐오하며 그 경계에서 스스로의 윤리를 재확인한다. 하지만 그 윤리는 진짜 윤리인가? 아니면 타자를 규정함으로써 자기 안심을 유지하는 얕은 정당성일 뿐인가?



괴물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괴물을 만들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문명 전체의 방식을 되묻는 일이다.




5. 결론




괴물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이란 사회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격리하고, 이름 붙이고, 가두는 방식일 뿐이다. 파시파에의 사랑은 금기였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문명이 그 결과를 어떻게 다뤘는가이다. 괴물은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억압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억압은 지금도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미궁을 만들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를 그 안에 가두며 스스로를 ‘정상’이라 부른다. 그러나 신화는 말한다. 괴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미궁이 사라진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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