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주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
도시를 벗어날 수 없었던 날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아카데미를 거쳐 원하던 방송작가가 되고 나니 드디어 방송작가가 됐다는 기쁨보다 처음 발을 들인 사회생활의 고단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은 막막했고 힘에 부쳤다. 휴일 없이 계속되는 일과의 전쟁, 막내작가라는 이유만으로 견뎌야 했던 무시나 모욕, 사람을 인재가 아닌 도구로 취급하는데서 오는 모멸감이나 좌절감, 때론 그런 것들마저 느낄 새도 없었다. 고된 노동에서 오는 무력감이 나의 몸과 마음을 잠식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며 나 자신을 원망했던 날들도 있었다. 원하던 방송작가가 되었지만, 지금 가진 지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는 아주 적은 열정 페이에도 불구하고, 차근차근히 경력을 쌓아나가며 막내작가에서 서브작가가 되었고 메인작가도 되었다. 이번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음 프로그램으로 공백 없이 갈아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카드값을 무사히 낼 수 있기를 기도하며 보냈던 날들. 정말 열심히 살고 있으면서도 허무했고 행복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버티면 더 좋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방송가에는 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자신의 몸과 영혼을 갈아 넣으며 오직 일만이 전부인 것처럼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에게는 그것마저도 버거웠다.
연차가 쌓이고 소위 말해 '짬밥'이 생기면서 일과 일하는 사람 사이에서의 불합리함을 더 견딜 수 없는 인간이 되었다. 태어나길 싫어하는 사람한테 절대 '좋은 척' 할 수 없게 돼 먹어서 작가 선배나 피디들의 말도 안 되는 막무가내나 이기적임을 더 잘 보게 되었고, 일에 대한 회의감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 자주 프로그램을 관뒀다. 참을 만큼 참다가 '이건 절대 아니다'라는 순간이 오면 프로그램에서 하차했고, 시간이 나면 여행을 다니는 일이 팍팍한 생활의 낙이 되었다. 그 가운데 만난 곳이 바로 제주이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혹은 혼자서도 제주여행을 와서 잠깐이지만 안식과 평화를 얻었다. 희한하게도 제주에만 오면, 서울에서 내가 죽도록 고민하던 문제들이 실은 아주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그리고 대체로 훨씬 가벼워지고 충전이 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가곤 했다.
우리가 제주를 사랑하는 이유, 아마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든 오고 싶고 매번 와도 새롭던 제주를 정말 많이 사랑했지만, 제주가 내 인생에 이렇게 깊게 들어오리라곤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의 인연은 아주 질기고 강력하게 이어졌고, 제주가 주는 그 무한한 껴안음을 이곳에 살면서도 자주 느낀다. 어딘가,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남으로 인해 얻은 자유이기도 하다. 지금은 예전처럼 몸과 마음이 다칠 정도로 과하게 일을 하지 않는다. 돈을 좀 적게 벌거나 그 일이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일의 스트레스 정도가 맥시멈을 치닫는 수준이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을 맞춰나가기 위해 노력하며 살게 됐다.
한 때는 도시에서 벗어나면 못 살 것 같았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막막했고, 인간관계 역시 달라질 까 두려웠다. 사실 도시를 떠날 수 있으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도시가 아니어도 나의 삶은 별 이상 없이 흘러가고 있다. 가끔 자주 가던 홍대 거리나 망원동의 분위기 좋은 술집이 생각날 때도 있다. 그때의 분위기나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수다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40여 년을 살아온 곳에 대한 미련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 있을까.
이렇게 벗어나 보니 실은 내가 쥐고 있던 많은 것들이 무용한 것이었음을 느낀다. 그 시간들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시간들과 경험들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에서의 내가 온전함을 느낀다. 지금 눈 앞에 닥친 수많은 불안이나 고민이, 절대 달라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 우리들을 괴롭히는 날이 많다.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들도 '절대' 바뀌지 않거나 바꿀 수 없거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런 일들이 더 선명하게 인지된다. 평온하던 바다에 갑자기 큰 파도가 치며 매섭게 변한다거나 영원히 썰물일 것 같은 바다에 어느새 밀물이 들어와 해안가까지 물이 차오를 때면 다시 실감한다. 그 모든 일들이 언제나 변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런 일들이 자연스러운 일들임을.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변화무쌍한 바다가 공포스럽고 걱정스럽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바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매서운 바다라도 조금만 떨어져서 기다리면, 반드시 잠잠해지는 때가 온다. 바다가 곁을 내줄 때 그때 다시 바다에 들어가면 된다. 무슨 일이든지 한발 물러서서 기다리면 결국 좋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건, 도시에서 벗어나 제주에서 비로소 알게 된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