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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우울에 대처하는 법

by 잔별

며칠째 비가 오고 흐린 날씨다. 제주에서 살면서부터 아침이면 거실에 나가 창문 밖을 확인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커튼을 열면 그날의 날씨와 기분을 대략 점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만 열면 간단하게 '일기예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요즘 같이 예측하기 힘든 기후변화의 시대에, 게다가 제주도의 날씨를 예보 하나에 의지하는 건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으므로. 그렇다. 많은 이들이 이미 경험해보셨고, 알고 있듯이 제주도의 날씨는 예측 불가능한 날이 많다. 제주도에 살아보니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지난겨울, 유례없는 대설이 제주도를 뒤덮었을 때는 그 광경을 똑똑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파랗고 맑은 하늘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드리우더니 순식간에 회색빛 눈송이들이 마구 쏟아졌다. 하늘이 너무나 시커매서 흰 눈송이들도 잿빛으로 보일 정도였다. 눈이 참 무섭게도 온다 싶었다. 이러다가 고립되는 건 아닐까?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불과 한두 시간 뒤 날씨가 완전히 달라졌다.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뗐다. 거대한 먹구름이 사라지고, 흐린 하늘을 열고 말간 하늘이 배꼼- 얼굴을 내밀었다. 그 하늘의 빛이 너무나 청명해서 온갖 세상의 찌꺼기가 다 씻겨나가는 기분까지 들었다. 언제나 무해한 하늘은 잠깐 사이에도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바닥에 내린 눈도 그새 많이 녹아 있었다. 이게 다 뭔가 싶었다. 제주도 날씨 한번 소란스럽네! 하하.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제주도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꾼, 제주도의 변덕스러운 날씨. 이곳에 살기 전에 제주도를 떠올리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그에 어우러지는 파랗고 맑은 바다, 혹은 옥빛의 바다. 예쁜 하늘을 배경으로 선 한라산의 웅장함과 푸르름, 제주 지역 어디를 가도 낮은 하늘 아래 버티고 선 크고 작은 오름들의 정다움과 초록 초록함이 눈에 선했다. 눈앞에 파노라마 뷰가 펼쳐지듯 자동적인 반응이었고, 그 이미지들을 참 좋아했다. 미세먼지에 뒤덮여 잠깐만 밖에 나가도 목이 따갑고 눈이 매운 서울의 날씨에 지치고, 교통체증으로 뒤덮인 거리를 지날 때마다, 어서 빨리 제주도에 내려가 맑은 공기를 쐬며 바다를 실컷 보고 싶었다.


그런데 제주도는 그렇게 쉬운 섬이 아니었다. 내가 원한다고 날마다 그런 멋진 날씨를 선물해주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설정해 놓은 제주도의 이미지에 갇혀 맑은 날을 주지 않는 제주도를 원망한 날도 있었다. 주말 내리 비가 오거나 요즘처럼 봄꽃들이 만연하는 봄날, 비가 오는 제주도는 조금 얄밉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만개한 벚꽃도 비가 와서 다 떨궈놓았고, 주말 캠핑 계획도 미뤄놓게 만들었다.


원래부터 날씨에 유난히 집착했던 나는 제주도의 알 수 없는 날씨가 처음엔 좀 힘들었다. 뭔가 계획에 차질이 생길 일이 많으니 야외 계획이 있으면 '내일 날씨가 맑아지게 해 주세요'라고 어린아이처럼 빌기도 했었다.

그러니 분명 좋을 것 같았던 날씨가 갑자기 달라지면, 배신감마저 들었다. '제주도 너 이놈의 날씨야, 나랑 지금 밀당하니?' 싶기도 했다. 내가 제주도 날씨에 의연하게 된 건,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찾아왔다. 그냥 그때그때의 날씨에 맞춰서 계획을 바꾸거나 달라지는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이런 게 빠른 포기와 수긍인 건가. 어차피 날씨를 이길 수 없다면, 그 날씨에 맞춰 나의 생활과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제주도의 날씨가 아주 많이 변덕스러워서 쉽게 진로를 변경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3일 내내 비가 온다고 되어 있어도 하루 종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흐리다가 비가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하며, 조금 내리다 말기도 한다. 그리고 서쪽이 흐린 날 동쪽은 쨍한 날도 많고, 산간지방 날씨는 나쁘지만, 해안지방 날씨는 좋을 때도 있다. 그러니 지금 날씨가 안 좋다고 해도 너무 우울해하거나 계획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노선을 살짝 변경하거나 그래 봤자, 네가 얼마나 가겠냐. 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기다리다 보면, 금방 좋은 날씨를 회복한다. 제주도의 변덕스러움을 믿고 기다려라. 다시 파란 하늘을 보게 될지니. ㅎㅎ


어찌 보면 제주도의 푸르름은 우리 모두의 로망일지도 모르겠다. 일 년에 한두 번 제주도를 찾을 때면, '정말 날씨가 좋았으면' '날씨가 이번 여행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제주도에 여행을 올 때마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을 여행 중 하루 이틀은 꼭 경험했던 것 같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려서 예정된 일정에서 노선을 바꿔 다른 여행을 하기도 했고, 그냥 숙소에서 쉰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제주여행을 아주 망쳤다거나, 제주여행이 나빴다고 느껴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그냥 좋은 곳이 여기 제주가 아닌가.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 초심을 잠깐 잃어버렸던 것 같다.


그래도 제주의 날씨는 여전히 가끔 나의 우울을 주관한다. 그럴 때는 집에서 창 밖만 보며 가만히 있기보단, 잠깐이라도 바깥공기를 쐬어준다. 비가 오거나 흐리다가 잠깐 갠 틈을 이용해 주변 산책을 하거나 단골 카페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 좋아하는 커피를 사 온다. 비가 온 후의 제주엔 새소리가 더 청명하고, 풀내음은 더욱 짙다. 상쾌한 공기를 쐬고 기분을 환기시키면, 다시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또 어떤 날엔 창밖이 잘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비가 오는 바다를 실컷 보고 오기도 한다. 평소보다 약간 더 비릿해진 바다향기를 맡으며 잿빛 바다를 남편과 함께 구경한다. '비가 오는 오늘, 제주는 참 운치가 있네' 하면서 그 시간을 만끽하기도 한다.


이렇게 아주 소소하고 간단한 것들이 내가 제주의 우울을 견디거나 제주의 일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법이다. 인생 뭐 있나,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요즘처럼 꽃들이 만발하는 날이면 그런대로 그 자체의 모습을 즐기고자 한다면, 지금 이대로의 제주에서의 모든 날이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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