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걸 끊어 낼 용기

이 나이에도 좋은 놈 진짜 또 온다

by 잔별
제가 적은 나이가 아니어서요.



며칠 전에 라디오를 듣다가 심하게 감정이입을 해버렸다. 몇 년 전, 내가 친구들한테 침 튀겨가며 했던 말들을 라디오 DJ가 똑같이 열을 올리며 하고 있었는데, 그 라디오의 사연 인즉은 이러했다.


1. 30대 중후반의 한 여자가 소개팅을 했다.

2. 그 이후 남자와는 매일 연락하고 있지 않다.

3. 소개팅을 한 후로 3주 동안 2번의 만남이 있었다.

4. 만나면 좋지도 싫지도 않은데, 몇 번 더 만나보고 싶다.

5. 상대 남자는 여자를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는 거 같다고 한다. (여자만의 생각인 듯)

6. 상대 남자는 40대, 일 때문에 바쁘시다. (그래서 연락이 뜸하다.)


그동안 왜 자주 못 만났냐는 DJ의 물음에 여자는 '아무래도 상대분이 나이가 좀 있으셔서... 그리고 바쁘신 거 같아서...'라고 한다. 말끝을 흐리며 ‘그분이 절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는 거 같긴 한데요.'라고 하는 여자. 대체, 여자는 어떤 근거로 남자가 자신을 ‘결혼 상대자’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사연의 정보만으론 근거가 1도 없어 보인다. 결혼은커녕 아직 ‘썸’의 근처로도 가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 하나.

정말로 나이가 많고 바쁜 남자는 소개팅한 여자에게 적극적이지 않은 걸까?


남자의 연락 없음을 이런저런 이유로 합리화시키고, 만남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 내고 있는 여자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자가 여자를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고 있어서 연락도 만남도 뜸하지만 봐주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러는 거지?’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DJ와 나는 또 통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DJ가 돌직구 질문을 날렸다.


"잠시만요. 실례지만, 언니 나이가 몇 살이신데요? 남자분은요?"


나와 비슷하게 잔뜩 흥분한 DJ가 물었다.


"남자분은 40대... 요."

"음... 그럼, 언니는요?"

"저는 서른... 여섯... 이요."

"아, 그럼 언니가 그 남자분이 많이 좋아요? 그래서 고민하는 거예요?"


DJ가 다시 물었다.


"아니, 그게 제가 적은 나이가 아니어서요."

"서른여섯이 뭐요? 당장 그만두세요. 그 남자가 좋아서 고민하는 게 아니잖아요. 솔직히 상대는 지금 양다리인 거 같아요. 남자들이 시간 없다는 말? 그거 다 믿지 마세요. 나이가 많든 적든 정말 좋아하는 여자라면, 잡으려고 어떻게든 시간을 내고 노력을 하는 게 남자예요."


아우. 속이 다 시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풀어내 준 DJ에게 박수를.




서른여섯이면, 적은 나이도 아니지만 많은 나이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나이 때문에 ‘확신 없는 관계’를 이어나가며 시간 낭비를 하기엔 아까운 나이다.


여자가 (여러 가지 의미로) 아닌 남자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고민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내 주변에서도 ‘나이’에 발목 잡혀 지지부진한 연애를 끝내지 못하고 ‘연애의 을’이 되는 친구들을 여럿 봤다. 그리고 한번 을이 된 관계에서 상황을 주도하며 결혼까지 가는 일은 더 쉽지 않기에, 결혼 준비부터 결혼하고 그 이후까지의 일들에서 마음고생하는 여자들도 많이 봤다. 그리고 그때 ‘나이’ 때문에 결정했던 선택을 후회하는 여자들도.


서른 초중반을 넘긴 여자들은 여러 가지로 불안해진다. 한 남자와 연애를 길게 했으면, ‘이젠 그 정도 연애했으면 더 늦지 않게 결혼해야 한다.’는 주변의 말들에. 반대로 현재 연애를 못하고 있으면 ‘지금 연애해서 결혼하고 애 낳아도 노산이다.’라는 무례한 언어와 태도들로부터.


남친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결혼하지 않았음’에 간섭을 받게 되고, 그러다가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해버리고 애도 낳고 전셋집 꾸며가며 신혼 생활하는 걸 보게 되면, 그 조급증은 더욱 증폭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내 나이가 이래서.’라는 말까지 하게 되고 만다.



아닌 걸 끊어 낼 용기


오래 연애를 하면서도 ’이 사람이 진짜인가.’ 확신을 주지 않는 관계. 그래도 ‘결혼 이후에는 달라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아닌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면.


처음부터 ‘긴가민가’ 마음을 모르겠고, 대체 이 남자는 나를 왜 만나는 건지 알 수 없는 관계. ‘만나다 보면 알게 되겠지.’라고 고민하고 있다면.


‘이제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닌데, 이 사람을 놓치면 다른 남자 또 만날 수 있을까? 이 남자는 나랑 헤어지고 어린 여자 만나겠지... 그런데 나는 계속 기회가 줄어들고 있잖아. 내 주변에 괜찮은 남자들이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이 남자 놓치면 큰일 나.’

라고 나이 때문에 헤어져도 될 남자와 만나고 있다면.


이제 과감하게 아닌 걸 끊어 낼 용기를 내길 바란다.


나보다 먼저 결혼해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 가는 친구들, 부모님의 압박, 늘어나는 숫자. 힘든 직장생활, 주변의 시선들까지, 아닌 걸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은 너무 많다. 하지만, 일단 용기를 내고 상황을 바꿔나가게 되면,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되고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진, 부단한 노력, 결단을 내릴 용기가 우선 필요하다. 친구들의 문제를 단호하게 충고하는 것과 실제로 나의 문제에 용기를 내는 일은 엄연히 다르고 분명 어려운 일인 건 맞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아니었던 지난 관계’를 되돌아보면 당시엔 보지 못했던 진실이 객관적으로 보이게 되고, 그때 용기를 낸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은 날이 온다.


나의 경우엔 이런 결단을 서른일곱 끝무렵에 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큰 결심을 한 거였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와의 이별은 꽤나 호되게 아팠다. 아픔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건재했고 다시 연애도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애매한 놈들도 여러 놈 만나봤고, 걔 중엔 괜찮은 사람들도 있었다.(많진 않았지만) 그리고 마흔에는 스무 살 같은 연애도 했다. 당시엔 다 끝난 거 같아 막막했지만, 그건 결코 끝이 아니었다.




이 나이에도 좋은 놈 또 올까?

이 사람을 놓치면, 다시 사랑하기 힘들까 봐, 인연이 없을까 봐, 좋은 사람을 못 만날까 봐... 별로인 관계를 끊지 못하는 여자들이 많다.


‘이 나이에 좋은 놈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이 나이에도 (내 경험만 놓고 보면) 좋은 놈이고 나쁜 놈이고 이상한 놈이고 어쨌든 오긴 오더라는 거다. 이십 대처럼 가만히 있어도 ‘놈놈놈’ 들이 주변에 넘쳐나진 않지만 (시간이 걸리긴 해도) 오긴 온다. 그 놈들 중에서 좋은 놈을 고르거나 혹은 고르지 않거나, 그건 또 각자의 몫이다. 지금이 막막해서 가만히 있는 상태보다 확실히 더 나은 상태가 온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 한 마디 하고 싶다. 그 이후가 있으려면, 일단 지금 ‘별로’인 상황을 잘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내가 친구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지금 손에 쥔 걸 놓아야 다른 걸 쥘 수 있다.


그다음에 어떤 걸 쥘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언제, 무엇을 쥐고, 그걸로 뭘 할지 결정하는 건

‘용기 있는 자’ 만이 할 수 있게 되겠지.


그래서 나도 여전히, 매번, 용기를 내려한다. 다음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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