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2022 카타르 월드컵의 열기가 가라앉기도 전에 곧 연말이 찾아왔다. 사실 나는 이번 카타르 월드컵 개막에 큰 관심이 없었다. 월드컵 따위, 내가 지금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다.
그런데 월드컵이 시작되고 우리나라가 우루과이와 첫 경기를 펼치던 그날, 알 수 없는 공허감과 우울이 밀려와 나는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마음이 한 번에 꺾이고 말았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 했거늘...ㅠㅠ
축구를 유난히 좋아했던, 애정하는 축구화를 사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동네 축구를 하고 온 후엔, 땀에 흠뻑 젖은 채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집으로 들어오던 그의 환한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번에 같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매콤한 닭날개와 소금 닭날개를 반반 시켜 맥주를 들이켜면서, 우리나라의 축구를 새벽까지 열정적으로 응원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행위를 나는 이번에는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월드컵 기간을 어떻게 지나야 하나...라는 생각.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허를 찔린 실망감과 배신감. 나는 그 좋아하는 맥주도 꺼내지 않고 TV만 켜놓은 채 방 안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진짜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많이 울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감정을 추스르려 애쓰고, 한국 축구 경기를 매번 챙겨봤다. 매 경기를 챙겨보다 보니 놀랍게도 혼자 축구를 보는 행위에 익숙해졌다. 인간이란, 참 간사하구나...
그렇게 간신히 월드컵을 넘겼는데, 이번엔 좀 더 센 게 온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다. 외로운 솔로들은 간절히 기도한다지... 푹 자고 일어나면 1월 1일이 되게 해 달라고. 나도 이런 소원이라도 빌어야 할까. 연말이 오니 그 어느 때보다 공허가 많아지고, 우울감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이건 지금 내 상황이 이래서 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홀리데이 블루', '홀리데이 증후군'에 생각보다 더 울적한 연말을 보내게 된다고 한다.
‘홀리데이 블루(Holiday Blues)’
홀리데이 블루(Holiday Blues)란, 연말연시 한시적인 기간에 우울이 증폭되는 현상을 말한다. 연말연시는 자연적으로 일조량이 줄어드는 시기, 이때 계절성 우울장애(SAD)를 겪는 사람이 당연히 많아지는 게 논리적으로도 맞는 이치다. 전체 인구의 5~10%가 일생에 한번 SAD를 경험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흔한 감정이다. 많은 이들이 이 기간엔 이유 없이 무기력하고 불완전한 감정을 느끼지만, 이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또 연말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은 우울감을 가져온다고도 한다. 연말연시엔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드라마에서처럼 예쁜 스토리가 내 인생에도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크리스마스의 기적 따위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TV, 영화 속 주인공들은 화려한 트리 장식 아래, 사랑하는 연인. 가족들과 행복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고, 길고 즐거운 여행을 떠난다. 창밖으론 눈이 내리고 거실엔 따뜻한 벽난로가 놓여있다. 맛난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선 가족들이 모여 '메리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와 '해피 뉴이어(Happy new year)'를 외치며 들뜬 연말을 보낸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적으로 평범하게 지나간다. 큰 맘먹고 준비한 이벤트에 실패해 휴일을 망치는 경우도 많다.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감은 두 배가 된다. 연휴를 잘 쉬지 못해, 오히려 몸은 피곤하고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고, 자괴감에 빠진 엉망인 몰골로 새해를 맞이하는 일도 다반수다. 새해가 와도 결코 삶은 새로워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니 나만 이 시기가 우울한 게 아니고, 나만 이 시기가 외로운 게 아니라는 걸 기억하자.
홀리데이블루는 홀리데이가 지나가면 자연스럽게 나아질 것이고, 우리에겐 그래도 기대해 볼 만한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올해 자고 나면 10년쯤 세월이 지나있는 미래를 상상하며 힘겨운 2022년을 보냈다. 그래도 끝이 다가온다니 진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위로가 든다.
행복은 '끝'을 잘 느끼는 사람에게 더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끝'은 때론 우울을 느끼게도 하지만, '끝'을 인정함으로써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우울과 상실,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2023년 새해에는 내 에피소드들이 좀 더 밝고 환한 것들로 채워지기를 기도하며... 글을 쓴다. 이번 주, 크리스마스와 다음 주 연말을 건강하게 나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모든 이들의 연말연시가 소소하지만 따듯하고, 스스로에게 위로가 있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