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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별 Jun 21. 2024

'관계'를 놓으니 '내'가 보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연을 오고 가며, 숱한 관계를 맺어왔다. 인생의 한 시절에는 관계 때문에 엄청난 고민을 하면서 보낸 기간도 있었던 것 같고, 어떤 파트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기도 했지만, 공통적으로 해온 생각이 있다면,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좋은 관계는 절대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며, 서로의 니즈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는 구심점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든 마음이든 물질이든, 인간이 가진 재화를 적절하게 잘 써야만 문제없이 굴러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와 처음 관계를 맺거나 꾸준히 이어나가고, 그러다가 좋은 관계가 형성되면, 시간이나 마음을 쓰는 일은 별다른 계산 없이 그냥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대충 나와 비슷하게 관계에 '다소' '깊은 마음'을 쏟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지만.


한 번 마음을 준 관계에 유독 관대해지는 면이 있다.

오래된 관계에 유독 관대해지는 면이 있다.

관계 때문에 유독 상처받는 면이 있다.


오랫동안 인간관계를 하면서 형성된 이런 나의 성향은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는 힘이기도 했지만, 잘못되거나 좋지 않은 관계를 질질 끌고 가다 결국 상처를 내고야 마는 가시가 되기도 했다. 그들에게 왜 나와 같이 마음을 쏟지 않느냐고, 왜 나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느냐고 할 수도 없었다. 어느 시점에 오기까지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했으니까. 구태여 그런 책망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관계가 조금 멀어진 후에 알게 되었다.


사실 '관계'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다. 사랑과 비슷하게 보고 싶은대로 보고, 믿고 싶은대로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짙어서 객관적으로 일반화시키기 어렵다.


관계를 중시하는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은 쉽게 관계에 도취되거나 관계 연민에 빠지기 쉽지만, 아닌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만나 관계를 이루더라도 모든 관계는 쌍방이어야 가능하다. 이것은 명백한 진리다. 일방적인 관계에는 힘이 없다. 있더라도 금방 빠지고 말 게 분명하다.


인생의 바닥에서도 나는 여전히 관계에 몰입하고, 관계 연민에 빠져 있었다. 많은 관계들을 돌아봤고, 어떤 관계에는 나의 진심이 닿지 않을 정도였을 거란 생각에 괴롭거나 미안해지기도 했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관계들은 조금 더 떨어진 곳에 그저 새겨지거나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관계들을 인정하기로 했다.


오래 맺어왔지만, 한때는 정말 가까운 사이였지만, 소중한 관계였지만, 지금은 아닐 수도 있는 관계들이 있다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다시 인지했다. 심플하게 관계가 변했음을 인정했다. 그러자 비로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풀렸다.


역시 모든 일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인정'이 먼저다. 너와 나의 관계는 여기 까지거나 지금부터인 것을 바로 보았다. 걷어낸 관계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잔존해 있었다. 그 관계들은 지난 챕터였지만, 이번 챕터에서도 나와주길 기대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내 인생의 한 챕터에서 매우 중요한 조력자이자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놓기가 무척이나 아쉬웠다. 하지만, 이어갈 이유가 없는 것들을 억지로 다시 등장시킨다고 다음 이야기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이전 챕터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편이 훨씬 나아 보였다.


인생의 다음 챕터에서 만날 등장인물들은 이전보다 훨씬 적고 다이내믹하지 않을 것도 같다. 하지만, 훨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전보다 나의 분량도 더 많아질 것 같다. 주인공이 비로소 현실자각을 끝내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나갈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주변의 인물들에 의지하고, 바라고, 맞춰가는 삶 대신, 스스로의 분량만으로도 가득 채워질 수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길 바란다.


지나간 관계들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 올 관계에 조금의 기대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가 오면 다시 내 주특기인 앞 뒤 재지 않고, 진심을 다해 좋은 관계 만들기에 주력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위해 노력해 나가려고 하는데, 그것은 '마음 챙김'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 챙김'의 행위들은 이미 시작되어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관계'를 놓자 보인 '나'를 온전히 끌어안게 되면서.



불교의 사상과 수행에서 유래한 '마음 챙김'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내면의 자아를 좀 더 잘 알기 위해, 괴로운 생각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그대로 관찰하면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마음 챙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그날그날 반복되는 일과에 집중하다 보니-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3킬로미터 거리의 가게를 걸어서 다녀오고, 창가 책상에 앉아 독서하고 글 쓰고, 바다 풍경을 스케치하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 챙김 기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혼자라는 게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먼저 우울을 말할 용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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