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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서 빛나는 사람이라는 구원

by 잔별

2020년 설날 연휴와 함께 무서운 감염속도로 중국을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에도 발생했다. 음력 1월 1일을 막 넘긴 희망찬 새해의 시작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도배된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사스, 메르스 등 몇 차례의 감염병 위기를 넘겼었기에 이번에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웬 걸~ 발생한지 한 달 정도 됐을 때 잠시 주춤했던 바이러스가 한 지역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창궐하더니 하루에 몇 백 명 씩 확진자가 나왔고, 어느 날은 8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는 등 전국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전염병을 막는 1차 수단인 마스크와 손소독제는 품귀현상이 생길 정도로 귀해졌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사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새벽부터 긴 줄을 서야했다. 이런 와중에 사재기와 불법 매점매석이 판을 쳤으며, 일주일에 단 2개의 마스크로 생활해야하는 ‘마스크 5부제’가 생겼다.


우리의 일상은 이 바이러스에 완전히 잠식당했다.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해 새로 생겨난 생활수칙들을 지켜야 하는 삶이 시작됐다. 우선, 어디를 가든 이동에 제한이 생겼고, 모임이나 집회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위에 대해서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권고되면서 자체적인 제한이 생겼다. 또한 마스크는 나와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였으므로 마스크가 없이 재채기를 하거나 감기 증세를 보이면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들이거나 의심환자들은 코로나 검사를 받고 14일 동안 자가 격리를 해야 하는 등 수칙들이 생겨났다.


영화에서 보던 일들이 실제로 재현되었고 상황은 생각보다도 더 심각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다른 나라 국민들을 입국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전 세계가 발이 묶인 채 동동거리며 이 상황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바이러스에 관한 영화라면, ‘감기’ ‘부산행’ 같은 국내영화를 비롯해 ‘인베이젼’ ‘블레임’ ‘컨테이젼’ 같은 것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영화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 위한 처절한 사투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더 이상 영화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고 있는 요즘, ‘생존’에 대한 인간의 본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살기 위해서 최대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 지금과 영화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 속 상황이 좀 더 극대화됐다는 사실 뿐일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생존본능’이 있고,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진리다. 살기 위해서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고, 인간은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만다. 지금은 마스크 품귀현상 정도로 그치고 있지만, 이 상황이 장기화 되거나 더 악화된다면, 생필품 역시 품귀현상이 생길 것이고 사람들은 더 동요할 것이다. 급기야 폭동이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살기 위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처참하다. 하지만, 이 같은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몇 달이 넘도록 뉴스 화면만 들여다보고 매일 발생하는 확진자 추이와 동선을 따라가다 보니 이것도 내성이 생기는지, 사망자 숫자나 확진자 추가발생 숫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된다. 처음에는 한 명, 두 명의 숫자에도 예민하게 굴었다면, 이젠 몇 백 단위로 움직이다보니 숫자에 무뎌졌달까. 스스로 계속 경계해야 할 일이다.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기분은 다운되고 생활의 활력도 떨어진다. 가벼운 산책이나 운동도 쉽지가 않고, 사람도 쉽게 만날 수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 혼자 사는 삶이다.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일하고, 혼자서 TV보고, 모든지 혼자서 해결하고 있는 생활. 며칠쯤이야 견딜 수 있었지만 장기화 되니 점점 지쳐간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당연해지지 않게 되자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일상의 소중함. 마스크를 벗고 숨 쉴 수 있는 세상. 누군가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고,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며, 영화관에서 웃으면서 영화를 본다. 그 어디에서든 제약 없이 식사할 수 있었던 당연한 일상들이 그립다.


하지만, 전 세계를 위험에 몰아넣은 신종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세는 여전히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 뉴스를 지켜보는 일에 피곤함을 느끼면서도 어서 빨리 일상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뉴스를 켜게 된다. 또 다시 홍수처럼 쏟아지는 각계 각국의 코로나 뉴스들, 그리고 그 속에선 의료의 최전선에서 쉼 없이 일하고 있는 의료진 분들과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 공무원 분들이 보인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저마다 가슴 속에 품은 사명감 때문인지 그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난다. 그들에게만 지금의 이 모든 고생과 희생을 강요하거나 위임할 수는 없기에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의료봉사를 자원하고 있다. 자영업자들을 위해 임대료를 인하하거나 받지 않는 착한 임대나 기부 등 온정의 손길이 커지고 있다.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되는 요즘이지만, 우리 인간들만은 최악이 아니다. 나는 그 가운데서 TV리모컨을 쥐어든 채 사람이라는 구원을 떠올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런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결코 관망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스스로 위기 속으로 뛰어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으로 마음을 표하는 이들도 많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도 없는 일들을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 나는 이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나만 잘 살겠다고 이 와중에 마스크를 사재기하고 터무니없는 가격에 마스크를 되파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얼마 가지지 못한 자신의 마스크를 나눠주는 이들도 분명 있다.


‘인간’이란 생존과 본능 앞에서 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존재이며 이 문제에서만큼은 타협이 불가능한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 생존 위기 속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 역시 사람이라는 구원이었다.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끼고 더 이상 ‘나의 마음을 내주지 않으리라’ 단단히 다짐할 때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치며 돌아오는 사람이라는 구원.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삶은 삭막해질 대로 삭막해졌지만, 서로간의 안부를 챙기고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져서 따뜻한 온정 덩어리가 되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인간관계에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 더 내려놓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구원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 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모두가 힘을 모아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하고, 함께 뜻을 모아야 할 때다. 머지않아 고작 바이러스 뿐 일 코로나19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고, 그 때 남는 것들이 절망이 아닌 희망의 이름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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