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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aD Feb 26. 2020

스타트업 이직, 두 달의 기록

스타트업 취직은 쉬울 줄 알았지?

1. 헬리콥터처럼 투두두두 이력서를 뿌렸다

나이트 삐끼가 명함 뿌리는 방식에 (디지털이다 보니) 헬리콥터의 분사력으로 살포했다. 그 결과 평균적으로 하루 걸러 하루 한 통의 탈락 메일을 받았고, 한 주 한 번의 면접을 보러 다녔다. 



2. 탈락 소식은 메일로 오거나 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당연한데, 처음에는 몰랐다. (내가 인사팀이었어도 굳이 전화로 "너 탈락이야" 하진 않을 텐데 말이다) 4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둔 푸릇푸릇한 시절, 가고 싶은 회사가 확고했던 나는 오직 그 회사 한 군데만 지원했다. (아마 미쳤었나 보다) 최종 결과 발표를 기다리던 어느 날, '띠링~' 하고 메일 알람이 울었다. "훌륭한 지원자들 사이에 선을 긋는다는 건 언제나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첫 지원이라 나는 몰랐던 것이다. 합격 통지는 전화로 오고, 탈락 소식은 메일로 전한다는 것을. 그래서 오직 전화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열어본 메일함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코 시린 어느 12월의 기억이다.

나는 모든 지원을 로켓펀치나 원티드 같은 스타트업 구인구직 플랫폼을 통해서 했는데, 그래서인지 서류 탈락 소식은 플랫폼 차원에서 메일이 오고, 면접 탈락은 함흥차사였다. 스타트업의 당위적인(마땅히 빨라야지!) 업무 처리 속도를 감안했을 때, 다음 날까지 연락이 오지 않으면 탈락으로 간주했다. 대체로 맞았다.



3. 하기 어려운 말을 쉽게 할 수는 없을까

지난 직장에서 탈락 소식을 전하는 것이 업무의 일부였던 때, 이걸 전하는 게 맞는지, 전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이 적절할지가 고민이었다. 여러 가지를 절충하다 보니 세상 애매하게 소식을 전했다. (미팅까지 진행했던 경우에는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 예를 들면,


우선, 관심 갖고 연락 주셔서 감사하다.

    -> "우선"이라는 인사치레에서 부터 감을 잡았다면 적중이다

보내주신 자료는 잘 받았다.

    -> 검토는 끝났다

차후 협업할/도움 드릴 일이 있다면 연락드리겠다.

    -> 지금은 없다


내 입장에서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게 보낸 메일이었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일단 다음 미팅 일정부터 조율하지 않겠는가?) 지원 결과 문의 전화를 종종 받았었다. "아쉽게도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던 케이블 쇼가 정답이었나.



4.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나는 선비(내가 바로 이성계 32 세손 엣헴)이자 여인이니 둘 다 해야겠다. 둘 다 별로 내키진 않는다. 이 말이 그저 고사성어가 아닐 정도로 서로를 알아보기란, 서로 같은 마음이기란 정말 너무 어렵다. 이는 연애 감정뿐 아니라 구인&구직에도 더없이 절절하다. 면접은 소개팅과 같아서, 상대방이 땡땡이 무늬를 좋아한다 하면 필시 근사한 땡땡이를 입고 나타나야 할 터이나,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 그게 나와 어울리는지를 만나보기도 전에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날밤 새워 준비했던 '사전 과제'는 나를 다음 면접까지 붙여주진 못했고, 턱 꽤나 괴며 다듬었던 자기소개서는 서류 탈락이었다.



5. 역량을 어떻게 말로 증명한단 말인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천착해야 한다. 앞으로 이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걸 내세우기 위해서는 내 지난 경력과, 그 경로가 이어질 추세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걸로 된 건가? 

"역량을 앉은자리에서 말로 보여주기는 정말 어렵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한 주 같이 일할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다" 고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해대는 지원자를 마음에 들어한 곳이 있는 걸 보면(나의 현 보스), 진짜 짚신도 짝이 있나 보다. 



6. 어느 대학이 중요한가? 어느 학과가 중요한가?

나도 잘 모른다. (애초에 대학 교육이 중요한가?) 다만 스타트업에서 찾는 인재는 "뭐든 맡겨만 주십쇼!" 보다는 "예 저는 sql을 다룰 줄 압니다. 관련해서 이런이런 프로젝트에서 저런저런 업무를 담당했고, 요런요런 성과를 냈습니다"에 가깝다. '신입 사원 교육'이라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대기업들은 살아있는 눈빛이라던가, 단정한 걸음걸이라던가를 찾는다. 직무 적합성보다는 조직 적합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그룹 공채에 직무라는 게 있던가?

우리의 고잉메리호가 야간 항해를 위해 별자리를 볼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저는 성실함이 지극하고! 일단 바닥 갑판부터 닦겠습니다!"라고 박카스 형 인재(?)로 어필해 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당장 출근하자마자 북두칠성을 찾아 항로를 가이드해줄 사람이 지원해야 하는 포지션이다. 

나는 장차 데이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사심에 온갖 데이터 관련 직무에 지원했는데, 전부 떨어졌다. 파이썬 수업 한 달 들은 걸로는 비빌 수 없었다.



7.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면접을 봤던 모든 스타트업이, 진심으로, 자신의 회사는 너무나 혁신적이고, 모든 시장에 적용 가능하며, 따라서 폭발적인 성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면접 자리에서도 그게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고 열정이 전해졌다. 주니어들이었다.

반면 시니어는 상대적으로 차분했다. 이미 다른 곳에서 비즈니스를 한 사이클 돌려봤거나, 정말로 이 일이 재미있어서 빠져든 사람이었다. 


그냥 그렇다고. 할많하않.



8. 스타트업이란 무엇인가?

오래 고민하던 주제인데, 회사 출근 첫날 깨달았다. 스타트업은 맥북을 쓴다. 맥북을 쓰지 않으면 스타트업이 아니다. 이놈의 회사, 스타트업인 줄 알고 지원했는데, 나에게 맥북을 주지 않았다!! 여긴 스타트업이 아니었다!!! 나에게 레노버를 줬다!!!!!! (디자이너와 개발자에게만 맥북을 준다고 해서 잠시 직무 피보팅을 고민했다)

여의도 간지가 칼 정장에 구둣발 소리라면, 테헤란로 간지는 맥북에 후드티가 아니겠는가? 맥북이란 무엇인가? 스타트업의 영혼이자 육신, 소프트웨어이자 하드웨어, 알파와 오메가 아니겠는가? 물 흐르는 듯 한 수려한 디자인과 독보적인 완성도, 다른 이들이 베끼기 바쁜 UX 등등, 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2%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 스타트업 아니겠는가?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나도 맥북 쓴 지 1년밖에 안됐다. 하지만 맥북 쓰다가 레노보 쓰니까 죽을 맛이다. (사실 두 기기는 가격차이가 꽤 나기 때문에 공정한 비교는 아니다)


스타트업은 당장 내일 회사가 망해도 직원들에게는 맥북을 준다. 침몰하는 타이타닉 안에 구명조끼는 없고 스페이스 그레이 맥북만 한가득이다. 연봉도 후려치고 맥북도 안 주면 아무도 거기서 일하지 않아서 그런가 싶다. 혹은, 스타트업은 남의 투자금을 받아 사업을 하기 때문에, 당장 이익을 남기는 것보다 (투자자가 판단하기에)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높이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수익보다 성장, 이번 달 영업이익보다 월방문횟수니 도달률이니 하는 지표(그 지표가 자신들이 봐야 하는 지표가 맞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신다)들이 더 중요하다. 아무튼 그래서 땡전 한 푼 못 벌어도 직원들에겐 모두 맥북을 사준다. 부럽다.



9. 결론: 존버

이 글을 쓰기로 결정한 이유는 취준 시 '존버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전화 인터뷰 후에 땡큐 이메일 보내면 좋다더라 하는 팁도 준비했는데, 그냥 구글 검색이 더 빠르다) 사실 나는 '버티는 시간'을 믿지는 않는다. '버텨야 하는 이유'가 불변한다면, 존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직은 회사 다니면서 준비하라고 조언하나 싶다. 현실적으로, 백수가 "나는 착실한 소작농이니까 좋은 지주를 만날 수 있을 거야"라고 마인드 컨트롤하며 쏟아지는 탈락 메일을 씹고 존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존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 vs 조직, 상대방이 구렸을 때 누가 더 손해인지 따져본다면, 나는 조직의 일부일 뿐이지만 회사는 내 시공간의 대부분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발에 채이는 게 스타트업인데 아무 데나 골라 가지 뭐"라고 쉽게 시작했지만, 막상 취준을 시작하니 갈 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매칭 확률이 높은 분야의 포지션에만 집중 지원하던, 아예 지원 모수 자체를 높이던, 전략은 상황에 따라 수정이 필요하겠지만, 언젠가 당신은 당신을 알아봐 주는 착한 지주를 만날 것이다! 

나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어찌어찌 (심지어 매일 보던 원티드도 아니고 다른 사이트 보다가 우연히) 지원했고, 블록체인 엑셀러레이터 겸 투자사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한 경험보다 포천에서 편의점 영업관리하면서 목재 가구에 페인트 칠한 경험에 더 관심을 갖는 면접관을 만나, 어느새 출근 3주 차다.


10. 존버2

취준하며 써둔 글을 취직하고 다시 보면서, 그 때의 눅눅한 불안감이 새삼 신선했다. 그래, 결심했어! 착실한 소작농이 되자! 월급을 탐내며 시간을 뭉개지 말고, 빠르게 연차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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