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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aD Oct 05. 2023

눈에 보이는 그 너머, 인종과 성별과 사회적 신호

다합 > 카이로 > [나이로비] > 킬리피 > 몸바사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바닷가 마을 다합에는 각기 다른 생김새의 개울가 조약돌처럼 각양각색의 지구촌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래 머무는 여행자들 중에는 자신의 취미 겸 특기를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나누고 5천 원쯤 참가비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겉모습만큼이나 특기도 다양했다. 사막의 달빛 아래 빈야사 요가, 매일 아침 8시 바닷가에서 태양의 기를 받아 체조하기, 물에 떠서 명상하기(floating), 소마틱 춤추기, 모델과 함께하는 스케치 등등. 덕분에 '오래 살고 보니 별 걸 다..' 류의 것들을 짧게 살면서도 해볼 수 있었다.

시각화(visualization)라는 세션은 뭘 하자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신청했다. 반라의, 장발의, 망토 두르듯 웃통에 문신을 두른 금발의 푸른 눈 남자가 문을 열어줬다. 그는 뜨거운 물에 카카오 가루를 타고 매운맛 나는 향신료를 살짝 뿌려 마실 걸 내왔다. 그는 "우리의 뇌는 두개골 안에 갇혀 외부 세계와 차단돼 있다"며 "우리가 보고 듣고 감각하는 모든 것은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했다. 

환각을 보기 위해 우리는 5분 동안 자신의 손을, 마치 손이라는 걸 처음 보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관찰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그 손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언뜻언뜻 내 손이 보였다. 눈을 감고도 눈에 비치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카이로는 이집트의 대도시였다. 다합과 달리 길 위에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카이로에서 20분만 차를 타면 나오는 기자(피라미드들이 있는 곳)는 관광지였다.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세계 각국의 언어로 호객하는 이집트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에서 나의 이름은 니하오였다.

시장 바닥에서 중국인 뺨 때릴 수 있는 사람들은 아마 이집트인 뿐일 것이다.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들은 무슨 짓이든 했다. 나에게 중국 도시 이름을 외치는 데(대부분은 촤나!!라고 외치지만 차별화를 위해서인지 몇몇은 도시 단위로 내려갔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무렵 멀리서 '바르셀로나!!!!' 하는 소리가 들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킨십이나 귓속말(로 그들이 생각하기에 중국어처럼 소리 나는 단어 말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불쾌하게 관심을 끌어서 매상을 올린 성공 경험이 있는 걸까? 더위와 호객 행위로 지친 눈에 비친 거대한 돌무지무덤은 초라했다. 저거 쌓는다고 몇 명이나 죽었을까 싶었다. 

정작 나를 가장 지치게 한 건 '너 어디(나라)에서 왔니?(Where are you from)'라는 질문이었다. 카이로에 머문 이틀 동안 백 번 정도 들었다. 반복해서 들으니 철학적으로 다가왔다. 난 어디서 왔을까? (굳이 답하자면 일산 신도시 키즈 2컵에 일본 무사도 1 티스푼, 할리우드 1+1/2스푼과 남캘리포니아산 개썅마이웨이 1스푼 정도?) 잡상인뿐 아니라 길거리 행인 1 2 3도 다들 궁금해했다. 내가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 그들은 아시아 국가 이름을 하나씩 대기 시작했다. 촤나? 노. 제펭? 노. 말라시아? 노. 촤나? ...노. 벳남? 노. 꼬레? ...노.

얼떨결에 한국도 노를 하고 나니 '그럼 어디서 왔냐'는 끈질긴 질문에 미국이라고밖에 할 수 밖 없었다. 할 줄 아는 언어가 한국어와 영어뿐이니. '이 노랭이가 아시아에서 온 게 아니라고?'하는 표정의 그들은 대화를 종료하거나, '미국 어디서 왔냐'라고 한번 더 물었다가 '빌링스'라는 생면부지의 답을 듣고 나서야 대화를 종료하거나, '그럼 너의 부모님은 어디서 왔냐'라고 물으며 대화를 종료하길 거부했다.

미국이라고 하면 대화가 길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촤나? 하면 'ㅇㅇ맞음' 이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는 전설의 시나이산을 오르던 중,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같이 걷던 사람이 내게 '넌 미국에서 왔니?' 하고 물었다. 아주 잠깐 동안 시간이 멈췄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궁금해했다. 그중 오직 이 사람만이 내 피부색 너머를 볼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왔다는 이 작은 체구의 어린 여자가 내게는 피라미드보다 경이로웠다.


아프리카 대륙은 전 세계적 무지로 인해 '아프리카'로 퉁쳐지지만, 북아프리카는 중동에 가깝다. 이집트는 '이집트아랍공화국(Arab Republic of Egypt)'이고 이들이 말하는 이웃 나라는 카타르나 UAE다. 언어는 이집트계 아랍어(Egyptian Arabic)를 쓴다. 하루 다섯 번 길가에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로 하루의 때를 알 수 있다. 종교가 곧 라이프스타일인 아랍 문화권은 '전통 복장'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통 혹은 종교 복장이 그렇듯 의복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성별 구분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귀와 목덜미가 드러나는 짤똥한 머리를 하고 목 늘어난 반팔티와 서핑 혹은 등산 브랜드의 반바지를 입고 노브라에 크록스를 질질 끌고 다니는, 생물학적 성별과 젠더 정체성 모두 여성인 나는 틀림없이 남자로 인식됐다. '성범죄 공화국에서 남자로 패싱 된다니 마음이 놓인다'며 애인은 만족스러워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성별 신호 교란은 여러모로 편리했지만 여자 화장실에서 쫓겨나는 등 곤란한 적도 종종 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공항 보안 검색대였다. 사람 손으로 하는 몸수색이 꽤나 농염했다. 한국에서는 IS니 무슬림 형제단이니 무섭긴 해도 먼 나라 이야기지만 이집트에선 자기 나라 이야기였다. 자기 나라 금속탐지기가 못 미더웠던 건지 (공항 보안검색대보다는 슈퍼마켓 도난방지기처럼 생겨서 나도 미심쩍긴 했다) 탐지기에 초록불이 떠도 꼼꼼하게 주물렀다. 인간보다 천만 배쯤 귀여운 개나 고양이가 발바닥 젤리로 그렇게 더듬었대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내가 남성으로 인식되게 둘 순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아 했다. 워먼? 워먼? 재차 따지던 그들은 내 말을 믿을 수 없었는지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여권에 적힌 FEMALE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심각한 얼굴로 그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히잡을 쓴 여자 직원이 가장 크게 웃으며 내 몸을 충분히 더듬고 난 후에야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 공항에는 보안 검색이 두 차례 있었다.

똑같이 생긴 엑스레이 수하물 스캐너와 똑같은 방식의 몸 더듬기를 두 번 반복하면 보안이 강화된다는 믿음을 가진 곳에서 나는 두 번 다 위험인물이 됐다. 국제 마약상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성 역할에 기초해서 사회 질서를 쌓아 올린 그들에게 나는 실질적인 위협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삼강오륜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아버지도 아들도 아닌, 어린아이라고 주장하는 노인, 곤룡포를 두르고 익선관을 쓴 종 9품 미관 말직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의자에 앉으니 앞자리 오순도순 모여 앉은 여자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히잡을 두른 뒤통수가 모여 반들반들하게 잘 닦인 개울가 돌멩이처럼 보였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더라면, 그 강력한 사회적 신호(signal)에 모두 나가떨어져 아무 문제 없이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약상이로소이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곳에서 신은 알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국인이라기엔 지나치게 까무잡잡한 피부와 지나치게 꼬불거리는 머리카락과 여자라기엔 지나치게 편안한 옷들과 그 밖에도 여러 엇갈리는 신호들을 한꺼번에 발산하며 다시 한번 나이로비행 비행기에 올랐다. 인샬라(انشاالله), 신의 뜻대로.




여행하다 휴대폰을 두 개나 해먹어서 당분간 사진이 없습니다. 다음 번에는 국가(vs 부족)와 자유 시장이라는 환상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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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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