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함께하는 여행
어딘가로 떠나오면 비로소 내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게 될 때가 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 기분 좋은 긴장과 적당한 설렘이 뒤섞여 누군가를 향한 내 마음이 호감인지 호기심인지 아직 또렷이 모를 무렵, 여운이 진하게 남은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 그것이 좋아하는 마음인 줄 알았다. 그리고 늦은 저녁 그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와서, 오늘 아주 맛있는 식당에 왔는데 다음에 꼭 함께 가자고 했을 때, 그것 역시 좋아하는 마음임을 알았다.
남편과 친구였던 시절, 처음 만났을 때야 둘 다 같은 학번의 어린 대학생이었지만, 20대를 함께 지나오면서 우리는 이내 삶의 거처와 처지가 계속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늘 붙어 다니면서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김밥을 나눠먹고, 과제를 하고, 함께 지하철을 타면서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던 날들을 지나 남편은 군대로, 나는 회사로, 나는 다시 스위스로, 남편은 영국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것들을 보고 느끼며 다른 시간들을 보냈다. 언제던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던 그는 자신이 요즘 좋아하는 곡들을 mp3에 담아서 가지고 나와 내게 들려주었다. 서로 떨어져 있던 많은 밤들이 전화기 너머로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설명해주면서 지나갔다. 나는 홀로 몇 달간 유럽을 여행하며 들렀던 모든 도시에서 남편에게 엽서를 적어 보냈다.
그것은 시간과 경험이 흐르고 머무는 곳에 따라 달라져만 가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공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본 것, 들은 것들을 내가 좋아하는 친구에게도 들려주고, 보여주고픈 아주 단순한 마음이었다.
내 나이 스물한 살, 멀고 먼 캐나다에서 차로 한참을 달려 처음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았을 때, 고함치는 것 같은 폭포 소리며 거대한 물보라가 만드는 무지개까지. 모든 면에서 압도되는 그 장대한 광경을 처음 보고 딱 들었던 생각은 '와, 엄마 아빠한테 보여주고 싶다!'하는 거였다. 맛있는 거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사랑이라더니, 좋은 것을 볼 때 생각나는 마음도 사랑이었다. 사막에서 바라본 까만 밤하늘에 흩뿌린 설탕 같던 은하수와 어느 외딴섬 작은 골목에서 만난 졸고 있던 강아지를 보여주고 싶은 거. 시차 없이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 서서, 내가 마주치는 경이롭고 사소한 모든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었다.
남편은 작곡을 전공하고,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다. 내가 늘 음악에서 부러워했던 것은 그 '동시성(simultaneity, 同時性)'에 있었다. 작곡은 좀 다르긴 하지만, 곡을 연주할 때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이 같은 시간 속에서 동시에 느낄 수 있기에. 내가 바라는 사랑은 음악이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 오늘의 노을이 물드는 풍광을 바라보고, 바다내음을 맡고, 신선한 음식을 맛보면서, 들려오는 소리들 안에 나란히 앉아 그 모든 것에 감탄하는 일은 여행이라기보다 차라리 마음 벅찬 사랑고백이었다.
여행 에세이를 읽거나 여행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의 절정에 이르러 아름다운 풍경을 보거나 감격적인 순간을 만나면 가족이나 연인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곤 한다.
머물러있던 일상에서 벗어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을 때, 잠잠한 내 마음 밑바닥에 가만히 고여있는 사람.
그래서 마음 안으로 감동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은 그래서 좋다. 떠나면 그리워질 사람과 함께 떠날 수 있어서.
여행이기도 했지만, 몇 년 만에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선물을 바리바리 챙겼다. 내 동생 단비는 LA에 살고 있으니 한인 타운에 마트도 있고 근처에 한국식당도 많았다. 거기에선 한국 제품들을 전부는 아니어도 거의 실시간으로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만큼 비효율적인 것이 또 있을까. 또 비효율적이고 미련한 것만큼 진심을 전해주는 것도 없다.
남편과 나는 오랜 친구였고, 서로 오랜 시간 엇갈리고 먼길을 돌아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사계절이 바뀌는 동안 연애를 하고 일 년 하고 일주일이 되던 날 결혼했는데, 연애를 하는 그 일 년 동안 남편은 하루도 빠짐없이 퇴근 후에 나를 데리러 왔다. 당시 남편의 직장과 집은 차로 10분 내외의 거리였는데, 일을 마치면 어김없이 멀리 떨어진 나의 사무실로 달려와서 나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그때 나의 디자인 스튜디오와 우리 집 사이의 거리는 왕복 40킬로미터가 넘었다. 차가 막히는 퇴근 시간이면 길 위에서만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거리였다. 그렇게 날마다 꼬박 일 년을. 벚꽃잎이 흐드러진 봄날뿐 아니라 비가 너무 많이 쏟아져서 와이퍼가 쉼 없이 움직여도 앞이 잘 보이지 않던 어느 여름밤에도, 폭설로 모든 길이 얼어붙었던 어느 겨울날에도, 서로 다투거나 피곤하거나 아프거나 혹은 몸과 마음이 지쳐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날들도 분명 있었을 텐데, 그는 한결같이 매일 저녁 노을처럼 내게 왔다. 그 숱한 시간과 수고와 비용을 길에 쏟으면서도 잠시라도 함께 있기 위해서, 그게 좋아서. 미처 셈을 하지도, 힘든 줄도 몰랐던 그 즐거운 수고와 행복한 어리석음이 바로 사랑이었다.
몇천 원짜리 물건을 멀리 있는 연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몇만 원짜리 국제택배로 보내는 것, 그냥 사 먹어도 되는데 기어이 꾹꾹 눌러 담아 국물이 배어 나오는 엄마의 김치통 같은 것, 아이가 가지고 놀던 커다랗고 다 망가진 장난감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것, 가격표도 영수증도 없이 부치는 마음이 사랑이었다.
그래, 사랑은 이렇게 비합리적이었다. 거기에도 있는 온갖 자잘한 것들을 보내려고 기꺼이 그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도 아까운 줄 모르는 것. 어리석고 미련한 것. 아무리 계산해보아도 손해인데, 도무지 가난해지지 않는 것.
그래서 나는 단비가 좋아하던 과자며, 단비가 없는 동안 한국에 새로 나온 함께 먹고 싶었던 소소한 군것질들과, 단비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이랑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동생을 위한 온갖 무거운 잡지와 두툼한 책들까지 여행을 준비하는 모든 날 동안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달려가 짐 보다 많은 선물을 꾸렸다. 그리고 그 거대한 선물을 모두 바리바리 싸들고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단비를 만났는데, 거기에 사는 애가 자기 몸의 절반쯤 되는 커다란 짐가방을 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단비가 풀어놓은 짐가방을 가득 채운 것도 모두 선물이었다. 형부가 좋아하는 책들과 얼이의 옷이며 장난감까지. 우리를 위한 선물들을 끝없이 꺼내놓았다. 터질듯한 가방을 꾹꾹 눌러 담아 짐을 꾸리면서, 도착하면 이내 비워질 테니 돌아올 때는 가볍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이 가벼울 리 없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의 선물들로 다시 가방을 가득 채우고 여행을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만난 내 동생. 그동안 나는 결혼을 했고, 임신을 하고, 얼이를 낳고, 일 년이 넘게 얼이를 기르며 내 삶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결혼을 하기 전의, 얼이를 낳기 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이제는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단비는 또 어땠을까. 짧은 여행만 다녀와도 일생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먼 타국에서 홀로 몇 년을 보냈으니 한 사람의 생각과 삶을 바꾸기에 얼마나 충분한 시간과 거리인지. 우리에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바다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시간은 우리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흘러갔는데.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한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마치 어제 만난 것 같다.' 그런데 단비는 정말, 어제 본 게 아니라 늘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가 먼저 도착해있던 숙소의 현관문을 단비가 열고 들어오는데, 그 순간 우리가 같은 집에 살던 때처럼, 아침에 나간 동생을 저녁에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로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성큼성큼 흘러 우리 사이에도 세월이 담처럼 단단하게 쌓였는데, 우리는 손을 잡고 성큼 그 위로 뛰어올라 그 담에 걸터앉아 그간의 일들을 풍경삼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그런 게 가족이겠지.
얼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가장 기뻐하고 살뜰히 챙긴 것은 단비였다. 멀리서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얼이 옷이며 신발이며 나보다 더 세심하고 든든하게 챙겨서 꼬박꼬박 보내오곤 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태어나 처음 만난 이모를 얼이도 정말 좋아하며 그렇게 잘 따를 수가 없었다.
사실, 내가 엄마가 되는 것만큼 놀라웠던 것은 내 동생들이 이모와 삼촌이 되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바로 밑의 다른 여동생은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얼이와는 얼마나 친한지. 시내에서 얼이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자 바로 얼이를 업더니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도 종로에서 광화문까지 그대로 걸었다. 얼이의 좋은 장난감이며 옷들은 거의 모두 이모들과 삼촌이 사준 것이고, 얼이도 이모와 삼촌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한다. 지금도 얼이는 주말에 이모와 화상통화를 할 때면 이모에게 보여준다며 휴대폰 앞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들을 다 끌어오고, 먹고 있던 과자도 이모에게 준다며 액정에 대고 툭툭 두드린다. 우리가 있는 여기는 지금 하늘이 파란색이지만, 이모네는 캄캄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매번 내 손을 잡아끌며 우리 지금 당장 이모네 놀러 가자고 한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단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주말을 우리와 함께 보낸 뒤 먼저 LA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헤어지면서 단비에게 건네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언제나 우리가 있는 곳이 네 집이야.'
집을 떠나봐야 집의 소중함을 안다고 한다.
어쩌면 집은 건물이 아닌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늘 집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이국에서도 항상 집에 머문다. 서로의 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