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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나 Feb 19. 2017

무엇이 좋은 여행을 만드는 걸까

여행을 떠날 때 가장 중요한 것

시선(視線)이 중요하다는 것은, 대학교 1학년 내 첫 카메라가 생겼을 때에 알게 되었다. 우연히 학교 같은 과 언니의 디지털카메라를 보고 나서 처음으로 어떤 물건에 푹 빠져버렸다. 과외며 학원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끝내 나는 당시에 막 출시되었던 손바닥만 한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하나 구입했다. 카메라는 졸업식날 아빠 손에만 들려있는 것인 줄 알았던 내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일이었다. 무려 8mb짜리 메모리 카드가 들어가는 그 작고 묵직한 은빛 디지털카메라에는 그보다 더 작은 액정이 달려있어서 사진을 찍고 난 후 바로 내가 조금 전 작은 사각형 안에 가둔 이미지들을 그 자리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와아, 세상에 이렇게 놀라운 물건이 있다니. 그렇게 사진에 빠지게 된 나는 다음 학기부터 사진 수업을 들으며 할아버지께서 쓰셨던 아주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의 일상에는 늘 카메라가 함께 했다. 휴대폰을 깜빡하고 두고 나간 적은 종종 있어도 카메라는 잊지 않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상이자 오랜 습관이었던 나는 이제 사진으로도 기록을 시작했다. 그 후로는 SX-70이라는 클래식 폴라로이드에 한동안 빠져있었다. 영화나 광고에 등장해 더욱 유명해진 SX-70은 금속과 가죽으로 만들어져 크고 투박하고 무거웠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는 사진들을 남겨주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멋스러웠다. 스위스 루체른의 한 벼룩시장에서 오래된 카메라를 한가득 가져오신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께 그 카메라를 구입한 이후, 혼자서 유럽을 여행하는 내내 나는 한쪽 어깨에는 커다란 DSLR 카메라를, 다른 쪽에는 그 오래되고 묵직한 폴라로이드를 메고 다녔다. 세 달 가까이 겨우내 운동화 한 켤레만 신고 다닌 여행이었지만 가방에는 늘 폴라로이드 필름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담겨있었으니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가지고 하는 여행은 간단히 나의 시선을 바꾸어 주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대학교 1학년 햇살이 부서지던 어느 오후, 수년간 날마다 오가던 집 앞 작은 골목을 걸어가는데 마치 낯선 도시로 여행이라도 떠나온 듯 눈 길 닿는 것마다 생경하고 새삼스레 아름다워서 나는 걸음마다 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아, 저기에 가로등이 있었구나. 저 빛바랜 담벼락은 저렇게 근사한 빛깔이었구나. 이 시간의 나뭇잎이 이런 그림자를 만들어내는구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모두 잘라내어 작은 사각형 안에 담으면 그대로 작품인 듯했다. 그 날이 내가 나의 첫 카메라를 산 날이었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동생과 함께 갔던 두 번째 런던에서 알게 되었다. 런던은 어릴 적 내가 막연히 너무도 동경했던 도시였다. 거듭된 단단한 상상 속에서 세련된 풍경과 반짝이는 화려함으로 쌓아 올렸던 도시는 막상 런던에 가자 축축한 비와 차갑고 음울한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머무는 동안 그 도시에는 내내 비가 왔고, 겨울의 런던은 오후 세시쯤이면 온통 캄캄해졌다. 싸다는 이유로 골랐던 숙소는 불편하고 눅눅하고 지저분했다. 물가는 비싸고, 발음은 알아듣기 어렵고, 모든 것이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한 켤레뿐인 얇은 운동화는 날마다 진흙탕에 젖었고, 가져온 옷을 모두 꺼내 입고도 매서운 추위에 웅크리고 걸었다. 빅벤의 불빛은 비에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런던을 떠나던 날, 안녕-런던.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하고 일기에 썼던 기억이 난다. 하필이면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일주일 만에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해서 괜히 마음만 더 괘씸해졌다. 떠나는 게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 동생과 다시 런던에 갔다. 나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유럽이 처음이었던 동생을 위해 끼워 넣은 일정이었다. 그런데, 저녁 느지막이 시내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둘이서 밤거리라도 잠깐 둘러볼 겸 걸어 나왔는데, 동생이 불을 밝히고 지나가는 빨간 이층 버스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해 여름 반짝이고 눈부신 런던을 다시 만난 것은. 때는 여름이었고, 저녁을 먹고 산책을 즐기고 커피까지 한잔씩 마시고 난 후에야 느긋하게 노을이 드리워지는 찬란한 계절이었다. 숙소는 소박하지만 깨끗했고, 작은 정원이 있었다. 런던의 박물관들은 모두 무료여서 우리는 날마다 좋아하는 박물관들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시장에 가도 재미있었고, 골목이나 거리만 걸어도 도시 곳곳에 세련미가 있었다. 내 기억 속의 런던은 다시금 선명하게 채색되었다. 그 모든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날씨도 아니고, 계절도 아니라, 내가 내 동생 단비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감흥을 잃어버린 모든 것에 즐거운 탄성을 지르는 법을 다시 알려준 누군가와. 나는 혼자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머무는 내내 폭우가 쏟아지고, 훨씬 더 추웠던 여행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런던이 달랐던 것은 마음이었다. 위축되고 고단해서 여유가 없었던 움츠린 마음이 아닌 눈 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과 주어진 상황에 감탄하고 감동할 준비가 된 마음. 여행을 바꾸는 것은 마음이었다.





여행을 떠날 때, 함께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남편과 여행을 하며 알게 되었다. 결혼하고 우리는 함께 여행할 수 있음이 행복했지만 남편과 나는 취향이며 스타일이 너무도 달랐다. 남편은 자연 풍광보다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관심이 많았다. 도시를 여행할 때도 쇼핑몰이나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는 것보다 시끌벅적한 시장이나 일상적인 풍경들, 도시의 오래되고 구석지고 낡은 부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여름휴가를 휴양지에서 보내기로 하고 준비했던 여행이었다. 남편의 휴가는 8월 첫 주로 매년 고정되어 있어서, 덕분에 극성수기에 여행을 떠나느라 우리는 해마다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예약을 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고심 끝에 우리는 필리핀 보홀 섬으로 떠나기로 결정하고, 마음에 꼭 드는 리조트까지 정해서 결제를 마쳤다. 여행을 많이 다녀보긴 했지만 휴양지로 떠나는 것은 우리 둘 다 처음이었다. 기대와 설렘 속에서 휴가 첫날,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는 공항을 출발해 필리핀에 도착했다. 밤늦게 도착한 뒤 세부 시내에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들고 보홀 섬으로 들어가기 위한 페리를 타러 항구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왠 걸, 하늘은 맑은데 파도가 높아서 배가 뜨지 못한다고 했다. 생각지 못한 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별 대안이 없었다. 몇 시간 후에 다시 와보라고 하길래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항구 근처를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헤매다가 대충 식사를 때우고 다시 터미널로 돌아와서 기다렸다. 푸르스름한 새벽에 도착한 항구에는 어느덧 해가 떠올라 곧 땅에서 이글이글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햇빛은 타는 듯이 뜨겁고, 땀이 줄줄 흘러내려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얼굴은 엉망이 되었고 옷은 끈적이며 다리에 엉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다시 배편이 최소 되었고, 또 몇 시간을 더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렇게 몇 시간, 또 몇 시간, 시간은 흐르고 햇빛을 피할 마땅한 곳도 없고, 짐은 여전히 무겁고, 배가 떠날 거라는 기약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배가 취소된 게 오늘만이 아니라며, 며칠째 파도가 높아서 보홀로 가는 페리가 뜨지 못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건 어쩌면 당장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배가 갈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는 이야기였다. 상황이 거기까지 이르자 나는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열기 때문인지, 엉클어진 마음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큰 맘먹고 예약한 리조트의 숙박은 이미 하루치가 날아갔고,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여름휴가를 이글대는 태양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바닥에서 땀범벅이 된 채 하루나 써버렸다는 게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마침내 그 날의 모든 배편이 취소되었다는 공지가 붙었고, 우리는 커다란 캐리어와 함께 덩그러니 해가 저물기 시작한 항구에 서있었다. 우리 둘 다 필리핀은 처음이었고, 당장 오늘 저녁 지낼 곳도 없었다. 내일과 모레가 어떻게 될지는 캄캄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내내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남편이었다. 

항구 앞 매표소에서 배편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 뒤엉켜 있을 때도,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을 때도, 결국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항구 대기실 구석에서 다급히 그 날 묵을 숙소를 검색해서 다시 시내로 이동할 때까지, 남편은 내내 평소처럼 내게 장난을 치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갑작스레 예약한 작은 호텔에 간신히 도착해서 가까스로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고 난 뒤 우리는 호텔 정원에 있는 테라스에 앉았다. 조금 누그러진듯한 내 표정을 본 남편이 내게 말했다.

“나는 여보랑 함께 있으니까 배를 놓쳐도, 길을 잃어도 다 재미있었어.”

그제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호텔 마당 곳곳에 떨어져 있던 열대의 꽃향기도 났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 그 순간에 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진심으로 설령 휴가기간 내내 배편이 취소되어 우리가 끝내 그 섬에, 그 리조트에 갈 수 없다고 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은 거였다.

이 것만으로도 해피엔딩은 충분하지만, 뒷이야기를 전하자면 그 여행은 진정 완벽한 여행이었다. 다음날 새벽, 며칠 만에 보홀로 향하는 페리가 드디어 출발했고, 우리는 그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배가 끊겼던 탓에 사람들이 예약을 모두 취소해서 우리가 예약했던 리조트에는 우리 두 사람이 유일한 손님이었고, 리조트에서는 지내지 못했던 하룻밤 대신 우리 숙소를 리조트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바꾸어주었다. 그 방은 우리가 꼭 지내고 싶었는데, 이미 예약이 되어있어서 포기했던 바로 그 방이었다.




무엇이 좋은 여행을 만드는 걸까.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떠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임을 이제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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