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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나 Feb 28. 2017

부모도 아이도 함께 살아가는 사회

거리에서 아이와 미소를 만날 수 있는 도시, 샌프란시스코

사람에게 반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단단한 성품은 일상의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드러나곤 한다. 내가 남편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수많은 사소한 순간들 때문이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남편은 우리가 어린 학생일 때부터 함께 식당에 가면 언제나 일하시는 분들께 웃으며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네고, 문을 지나갈 때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문을 잡아주었다. 주차장에서 나오면서 주차권을 정산하거나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 남편을 알게 된 지 십 년이 훌쩍 넘는 지금까지도 인사하지 않는 걸 본 적이 없다. 감사를 표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언제나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는 마음에 자리가 넉넉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는, 그리고 스쳐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공간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다른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진짜 내면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사실 도시도 그렇다.

마음을 끄는 사람처럼, 도시도 생각지 못한 순간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할 때 이 도시의 진짜 매력도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부분에서 드러났다. 우리의 발끝과 길 모퉁이에서.


나는 평소에 얼이와 서울 시내를 다닐 때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직접 운전해서 차로 다니는 게 편하기는 하지만, 남편이 출퇴근할 때 차를 사용해서 내가 쓸 수 없을 때가 많았고, 서울 시내는 아무래도 차도 막히고 주차가 복잡할 때가 많으니 출산 전에 혼자 다닐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아무래도 쉽고 빨랐다. 얼이가 태어난 후에도 육아와 일을 지속했던 나는 자연스레 얼이와 함께 그 전처럼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비로소 아이를 동반하는 사람이 왜 교통약자로 구분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버스를 타려면 일단 유모차는 힘들었다. 정류장에 서서 아이를 내리고 유모차를 접어야 하니 아이가 혼자 서기 전에는 아예 불가능했고, 유모차 탑승이 가능한 저상버스는 자주 다니지 않았다. 어찌해서 유모차를 접어 버스에 탄다고 해도 흔들리고 비좁은 버스에서 아이를 안고 유모차를 들고 이동하는 것은 몇 번 시도해본 후에 나중에는 아예 엄두도 내지 않게 되었다. 결국 버스를 타야 할 때는 아기띠를 사용해 얼이를 품에 안고 다녔지만, 아기띠로 외출을 하게 되면 아이를 마땅히 내려놓을 수가 없으니 내내 묵직한 아기의 무게를 어깨와 허리로 버텨야 했다. 엄마 혼자 외출해서는 화장실 가는 것조차 도전이고, 가방 하나 드는 것도 고역이었다. 더구나 얼이는 쑥쑥 자라서 일찌감치 10킬로를 훌쩍 넘겨 아기띠를 오래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다시 유모차는 어떨까. 유모차로 버스에 타는 건 너무 고된 일이니, 이번에는 지하철을 택했다. 그런데 지하철에는 계단이 장벽이었다. 그 전에는 그렇게 곳곳에 계단이 많은지도 몰랐고, 그래서 불편하다는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작은 턱 앞에서도 심호흡을 해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하철 입구를 찾아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먼 길을 돌아 걸어갔다. 그래도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다행이었다. 환승할 때는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미리 알아봐야 했다. 무작정 갔다가는 시간이 곱절로 걸리거나 아예 목적지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기억을 더듬고, 검색을 했다. 한 번은 유모차에 얼이를 태워서 외출을 했는데, 환승하려고 보니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3개의 지하철 노선이 겹치는 넓은 역이라 혹시 다른 쪽에는 있을까 싶어 역 안에서 돌고 돌아 헤매다가 다른 노선을 몇 번 오간 끝에 결국 역무실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이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으니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데, 입구에 놓인 기둥에는 '유모차/휠체어 진입금지'라고 붉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역무원 아저씨가 나오셔서 별 수 없으니 그냥 타라며 그 틈으로 아이가 탄 유모차를 밀어 넣으셨는데 에스컬레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유모차와 우리 위로 쏟아지는 영문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이 서늘하고 따가웠다. 그 후로는 웬만한 계단은 그냥 가방을 들쳐 메고, 아이는 한 팔에 안고, 혹은 아이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걸어서 오르내렸다. 이렇게 계단을 걸어서 지하철을 타거나 아기띠로 아이를 품에 안고 버스에 올라 균형을 잡으며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때로 악몽이거나 극기훈련에 가까웠고, 어딜 가든 땀으로 범벅이 되어 도착했다. 이제는 지하철 몇 정거장쯤은 유모차를 밀면서 걸어 다녔다. 그런데 이번에는 길을 걷다가 울퉁불퉁한 턱에 유모차가 걸려서 아기가 왈칵 앞쪽으로 쏠리거나 내가 유모차에 부딪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아닌 길거리를 걸을 때는 걷다가 몇 번이고 유모차 뒤쪽을 힘주어 밟아서 이런저런 턱들을 넘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니 늘 길을 살피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초보 엄마일 때는 유모차를 밀면서 걷는 것만으로도 손목이 욱신거리고 뒷목이 뻐근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휙 지나가면서, 혹은 맞은편에 앉아 들릴만한 목소리로 "유모차를 가지고 뭐 여기까지 나왔어."하고 말하는 걸 들었다. 분하고 서글퍼졌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걷는 게 이토록 몸과 마음이 피로하고 서러운 일이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계단 앞에서 절박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딘가엔 보도블록을 넘을 수 없어 돌아서는 사람들이 또 있겠구나 싶어 마음이 쓰고 가난해졌다.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도 우리는 대중교통으로만 이동했다. 둘이었을 때 우리의 여행 방식으로 셋으로도 함께하고 싶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고 나갈 때를 포함해서 도시 안을 오갈 때 지하철과 버스, 케이블카와 페리를 탔고, 대부분은 유모차와 함께 걸었다. 작은 유모차로 도시 구석구석을 얼이와 함께 다녔지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보도블록에서 보도블록으로 옮겨갈 때,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한 군데도 빠짐없이 완만한 경사가 설치되어 있어서 유모차가 한 번도 부딪치거나 걸리지 않았다. 지하철이나 건물 안에도 계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편에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번번이 긴장을 하거나 마음을 졸이거나 고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버스를 타던 날, 갑자기 도착한 버스에 나는 부랴부랴 얼이를 안아 올리고, 남편은 서둘러 유모차를 접느라 둘이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우리에게 서두를 필요 없으니 천천히 하라고 말했다. 돌아보니 모두 편안하고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급한 건 우리뿐이었다. 모두가 아주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기다려주었다. 버스에 탈 때는 대부분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로 탔고, 간혹 버스 내부에 사람이 많거나 비좁아서 유모차를 접어야 할 때는 멈춰있는 버스 앞에서 유모차를 접은 뒤 버스에 올랐다. 누구도 재촉하거나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으니 옆자리의 다른 손님들이 빙그레 웃으며 얼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유수유를 했던 나는 얼이와 외출할 때면 수유 공간을 찾는 것도 쉽지가 않았는데, 한 번은 서울 시내의 저명한 호텔에 갔을 때도 여기는 수유실이 따로 없으니 화장실을 사용하라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나마 아이가 있는 직원의 이해와 배려로 직원 탈의실을 잠시 빌려 사용했던 경우는 특별히 감사했던 경험이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얼이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찾은 화장실 옆, ‘아빠들 환영’이라고 적힌 널찍한 가족 라운지에서 한 아빠가 어린 딸아이의 머리를 묶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남자화장실에 번번이 기저귀 교환대가 없어서 변기 위에 아이를 세워놓고 기저귀를 갈았다며 땀을 뻘뻘 흘리고 돌아오곤 하던 남편과 함께 여기서는 우리도 조용하고 깨끗한 그 공간에서 얼이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아이와 있으면서 긴장하거나 서두르거나 조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거리의 보도블록마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기꺼이 즐겁게 아이와 가족을 배려해주었고, 우리는 마음 놓고 편안히 거리를 함께 걸었다. 언제나처럼 감동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스며있다. 내가 이 도시에 반한 것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금문교나 세련되고 멋스러운 건물들, 혹은 반짝이며 길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가 아니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보도블록에 반했다. 그 단단하고 평탄하고 사려 깊은 면에 마음이 녹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얼마쯤 지났을까. 유모차 보행권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걸어 다닐 권리라니. 세상에는 걸어 다닐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지하철을 타고, 함께 거리를 걷는다. 사실 이 거대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다니지 않는 것'이다. 다니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이러한 신체적, 심리적 불편과 고통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쪽을 택했다. 함께 다니는 쪽을.

평생을 함께 하게 될 누군가를 만나 삶을 맞춰가는 결혼이 그렇듯, 아이와 함께하는 삶도 자연스레 크고 작은 것들을 양보하고 배려하며 맞춰가게 된다. 그래도 나는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미뤄두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얼이가 와서 이제는 '함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전에 했던 모든 것을 얼이와 같이 하기 시작했다. 일할 때도, 놀 때도, 쉴 때도,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든 함께였다. 예전처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보고,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었다. 여행도 떠났다. 이제는 둘이 아니라 셋이서.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어딘가에 잠시 맡기지 않고, 부부가 오롯이 감당하는 육아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출산 후에도 내 사업을 계속했으니 인쇄소에 갈 때도 얼이와 함께 갔고, 얼이를 품에 안고 디자인을 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온전한 시간과 헌신과 수고를 필요로 하지만, 희생했다기보다는 나도 행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시간 속에 나도 즐거웠고 함께여서 좋았다고. 네가 자라는 동안 엄마도 함께 꿈을 꾸고 자랐다고. 나중에 얼이가 좀 더 크면 함께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려놓은 부분이 있고, 어떤 부분은 미뤄두기도 하고, 이전보다 더 애써야 하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우리가 꿈꾸고 바랐던 것은 부부가 기존의 일상을 무너뜨리며 무조건 포기하기보다는, 자연스레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삶과 사회는 단단할 수 없다. 사회의 작고 연약한 사람들에게도 내어줄 공간과 여유가 있는 것이, 사람들이 일상을 그저 살아가기 위해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진정 건강하고 당연한 사회라 믿고 싶다.


예전에 육아 관련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 연예인 아빠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해서 겪은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급하게 아이의 기저귀를 갈면서 초보 아빠가 쩔쩔 매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자연스레 다가오셔서 도와주시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아이를 돌보고 나서 아이의 아빠는 거듭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다. 앞으로 아이를 기르면서 이런 도움을 받게 되는 일이 얼마나 더 많겠냐며. 육아는, 아니 인생은 품앗이라고, 아이를 기르면서 신세 지게 될 많은 분들께 미리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미리 고맙습니다.” 하는 자막이 나오는데, 그만 울컥해졌다.

부모가 되면 의도치 않고 설령 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운 일이 얼마나 많아지는지. 요즘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과정이고, 단지 한 가정이 아니라 사회가 필요한 일이기에, 결코 강요할 수는 없지만 이해가 절실하고, 또 그런 작은 배려들이 더욱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어느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머물던 호텔 근처의 작은 식당을 찾아갔다. 동네에 알려진 맛집이라고 하더니, 이른 오전 시간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그 틈에 어울려 우리도 커다란 테이블 한편에 앉았다. 식당은 북적이는 손님들과 밀려드는 주문으로 분주해 보였다. 우리도 주문을 마치고 음식이 나오기를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웨이트리스가 다가와서는 내 옆에 앉아있던 노부부에게 먼저 커트러리를 놓아주고 갔다. 그런데 얼이가 그걸 보고는 포크를 달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 노부인께서 바로 커트러리를 집어서 먼저 사용하라며 우리 테이블로 건네주셨다. 당황한 내가 한사코 괜찮다고 사양했는데, 그다음 순간 그 부인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하시던 그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도 할머니예요.”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완벽히 이해받았음을 알았다. 온기가 내게 밀려왔다. 이토록 놀라운 공감대가 있을까.

나도 할머니예요. 나도 엄마예요. 나도 아빠예요. 내게도 아이가 있어요.

아이들에게는 도움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모들은 알고 있다. 이것이 자라는 과정이라는 것도. 나는 커트러리를 받아 들었고, 얼이는 스푼과 포크를 양 손에 들고 즐거워했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할머니가 보여주신 그 작은 웃음과 호의는 두고두고 내 마음에 남아 위로가 되었다.


엄마가 되고 난 후 나의 세계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의 나는 식당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길을 가다가도,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어디에 가든 아이들을 발견한다. 내 바로 옆에도, 신문 속에도, 눈길 닿는 곳에는 아이들이 있고, 그 부모와 가족도 있다. 그렇게 나의 세상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이를 갖게 되고 나는 더 깊고 많은 감정들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생기기 전의 나는, 감히 말하건대 한 영혼이 어째서 천하보다 더 귀한지 그 진짜 의미를 결코 알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줄거리의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감동적이면서도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성경 속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나서는 목자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런데 돌아와 보니 남은 아흔아홉 마리가 다 뿔뿔이 흩어져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며 마음의 여백은 줄어들었고, 차츰 건조한 사람이 되었다. 여간해서는 잘 울지 않는 팍팍한 어른이 되었지만, 그런데 지금은 더 잘 웃고, 더 잘 운다. 아이였을 때처럼. 그리고 아이에 관한 이야기라면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나와 관계가 있든 없든 아무 상관없이, 내 의지와도 관계없이, 세상 수많은 아이와 부모들의 피어오르는 기쁨과 타는듯한 아픔이 내 것이 되었다.


이 무렵의 얼이는 사람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짓을 하고 반갑게 알은체를 해서 이러다 낯선 사람이라도 따라갈까 봐 우리가 내심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얼이를 반갑게 맞아주고, 길에서 지나치면서도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트램이나 버스 옆자리에 앉아서도 함께 장난쳐주고 하니, 얼이가 정말 행복해했다. 마주하는 얼굴마다 웃어주니 이 도시가 얼이에게는 얼마나 따스했을까. 이런 도시에서 살게 된다면 아이들이 절로 밝고 마음이 넉넉한 사람으로 자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가서 톡톡 두드리며 웃고 장난치면서, 얼이는 가는 곳마다 친구들을 만들었다.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얼굴에도, 어깨에도, 바닥에도 내려앉았다. 샌프란시스코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열려있고, 유쾌하고, 따뜻하고, 친절한 도시였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아이와 함께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여행에서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았던 주말, 셋이서 함께 지하철을 타고 외출을 했다. 다녀온 여행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있을 때라 샌프란시스코에서 좋았던 것들을 돌아보면서, 나는 남편에게 얼이가 사람들을 보고 방글방글 웃을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함께 마주 웃으며 얼이를 대해주어서 그게 너무 고마웠다는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우리 곁에 다른 유모차가 한 대 더 와서 섰는데, 남편이 그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기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나중에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얼이가 살게 되었으면 하는 세상을 여기서 우리가 먼저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남편도, 나도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적당히 무심하고 때로는 냉소적인. 하지만, 변화는 어쩌면 웃음과 인사와 같은 여리고 가벼운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시와 무지를 미소로 돌려주고, 아주 작고 부드러운 용기를 내어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 그런 조그만 날갯짓이 쌓여 우리 아이들은 조금 더 따뜻한 바람이 부는 사회에서 자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마음속에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완만한 공간을 지닌 너른 어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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