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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나 Oct 24. 2021

프롤로그

여행하는 사람, 살아가는 사람


그런 생각을 가끔 한다. 만약 내게 일주일의 시간과 어디든 갈 수 있는 항공권이 주어진다면 어디로 갈까?

상상에는 돈이 안 드니까. 지금보다 좀 더 나이가 어릴 적에는 세상에 안 가본 곳이 워낙 많으니 매번 새로운 곳을 꿈꾸었다. 기회가 생기는 대로 없는 기회도 부지런히 만들어서 낯선 곳으로 떠났다. 지금도 여전히 가보지 못한 곳이 많지만 언젠가부터는 다녀온 곳을 다시 여행하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도시들은 거듭 방문할 때마다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보여주기도 하고, 변하지 않는 면을 드러내며 설풋한 익숙함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럼 이제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비용이 들지 않는 기분 좋은 상상을 양껏 해봐야지.

백지 수표처럼 어디든 목적지를 적어 넣을 수 있는 백지 항공권이 내게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갈까?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다. 이내 늘 마음 한편에 담아두고 있는 도시를 꺼내어 그 위에 적어본다. ‘로스앤젤레스’라고.


로스앤젤레스는 어떤 곳이더라. 누군가에게는 선명한 햇살로, 누군가에게는 유쾌한 분위기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뜨거운만큼 거칠고 투박하게 각자의 인상과 기억으로 그려지겠지만, 내게 그 도시는 가보기 전에도 다녀온 후에도 항상 그리움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그 낯설고 친근한 도시를 그리워하게 된 것은.

아마도 십여 년 전부터였을 것이다. 단비가 그 도시에서 살게 된 지 이제 십 년이 넘었으니까.


로스앤젤레스를 여행할 때 나는 철저히 여행자였다. 낮에는 시내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서점이나 박물관에 있다가, 퇴근한 단비랑 만나서 함께 장을 보거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살갗에 닿는 마르고 신선한 밤공기는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아서 밤새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우리는 밤마다 집으로 돌아왔다. 잔잔한 일상 같은 하루를 보냈으나, 그래도 나는 그 도시를 잠시 지나가는 여행자였다. 내가 일상 같은 여행을 하는 동안 단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실제 일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눈에 닿는 풍경은 어디든 엽서 같고, 나는 보는 것마다 설레고 감탄하고 쉽게 사랑에 빠졌다. 단비에게 말했다. 나는 아직도 네 집이 여기라는 게 실감이 안 나. 그때 들은 대답이 오랫동안 내게 고여있었다. 단비는 심상하게 말했다. 십 년 넘게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가 우리가 오고 나서야 비로소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그제야 아 여기가 참 예쁘구나 싶었다고.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기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고 그랬다. 내게 이 거대한 도시가 낯설지 않고 이토록 그립고 좋은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을 거다.


내 집은 대한민국 서울에, 단비 집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다.

나는 여행자로 그 도시를 걷고 느끼고 사랑했고, 단비는 그 도시를 살고 겪어내며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단비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이렇게 적었다. ‘잊지 마. 언제나 우리가 있는 곳이 네 집이야.’

이국에서 홀로 살아가는 단비에게 마음 디딜 곳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듯 적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말은 내가 그 도시에서 편히 잠들고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네가 내게 집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각자의 시선과 방식으로 여행하고 살아가며 경험한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한다. 아 여기가 이랬구나. 와 우리가 그랬구나 하고. 어쩌면 이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찾게 되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기대하면서.


밤의 서울에서, 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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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여행 중이다.

내가 바라던 20대의 모습이 있었다. 드넓은 곳을 여행하고 다양한 풍경을 담아보는 것. 그래야만 20대를 20대답게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열정과 패기 넘치게 도전하며 미래를 위한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얻고 싶었다.

해외에 살면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한국보다 한 살 느리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 아닐까. 마침내 만으로도 서른 살이 되던 날, 나의 20대를 돌아보았다. 주 5일 회사에 출근하고, 일이 끝나서 집에 오면 축 처져 잠자기 바쁘며, 내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아등바등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특별해 보일 수도 있는 LA에서의 삶이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보통날은 지루한 삶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생각하니 아쉬움이 크게 자리 잡았다.

그 무렵 책 한 권을 읽었다. 그 책은 내게 매일의 삶이 여행이고 행복이며 감사라고 이야기했다. 언니의 첫 에세이였다. 내가 로스앤젤레스에 처음 왔을 때는 스물두 살이었고 이곳에서의 삶이 아주 잠시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덧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잠시가 아닌 긴 머무름이 되었다. 오랜 시간 타지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부딪히고 넘어야 하는 것들이 많았으며 때론 매일이 나에게 도전처럼 느껴기도 했다. 나는 이따금 이제 여기 생활을 마무리하고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매해 계획을 세우다가도 아침이면 햇살 속에 새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걷거나 벤치에 가만히 앉아 날씨를 온전히 느끼고 있다 보면 그 많던 고민과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순간들이 이 도시가 나에게 주는 위로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위로 덕분인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때마다 매번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여기서 살고 있다.

조금씩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삶을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다 보니 어느새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야 돌아보면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내가 그토록 바라던 다양한 경험과 만남 그리고 길고 긴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잔잔한 것 같다가도 순간순간 따뜻함이 있는 이 도시에서 나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여행의 끝이 언제일지, 이곳에서 계속 이어질지 나조차도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긴 여행 중 나는 여기에 나의 집을 만들었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중이다.


낮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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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일상처럼. 언니, 이지나 

사 남매 중 첫째. 대한민국 서울 거주. 남편과 아이와 함께 셋이서 살고 있다.

1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디자이너이며, 책 ‘지루한 여행을 떠났으면 해’를 썼다.


일상을 여행처럼. 동생, 이단비

사 남매 중 셋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거주. 혼자 산다.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의류회사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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