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나 Oct 24. 2021

아이와 함께, 아이처럼


글. 이지나



여행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뭘까? 일단 넓게 보면 계절이나 날씨가 있겠고 환율 같은 것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 고르라면, 나는 단연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여전히 좋아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전에 누리고 즐기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년에 우리 가족은 휴가를 가지 못했다. 코로나19가 곧 끝날 거라고 믿고 휴가를 계속 미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늦가을이 되도록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우리는 그제야 늦은 휴가기간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면서 내내 집에서 원격수업을 하던 얼이의 등교가 재개되었다. 체험학습신청을 하고 학교에 빠질 수도 있지만 작년에는 등교한 날이 손에 꼽았기 때문에 그러기엔 너무 아쉬웠다. 일정을 나눠서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남편이 내게 혼자 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났다.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실컷 운전을 했다. 터널을 가로지르는 대신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한계령을 넘었다. 강원도에서 며칠을 지내며 천천히 밥을 먹고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매일 동네 서점에 갔다. 집에 돌아올 때는 선물로 남편과 아이를 위한 책을 한 권씩 사 가지고 왔다. 얼이는 학교에 가서 신이 났고, 남편은 살림에 적성과 재능을 재발견하고 집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셋 다 행복하고 만족한 휴가였다.

혼자와 함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만큼 함께 여행하는 것도 좋아한다. 누군가 단 한 명과 평생 여행해야 한다면 나는 남편을 택할 것이다. 그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다. 단비와도 아주 잘 맞는 여행친구다. 우리는 취향이 닮았고 서로 다른 부분을 잘 알고 맞춘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함께 여행한다. 얼이 역시 좋은 여행친구다. 얼이와 여행하는 것은 정말 즐겁다. 체력이 좋고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아이와 여행을 다니다 보면 가끔 질문을 받는다. 아이와 여행하기에는 어디가 좋은가요? 나는 기본적으로 여행은 함께 떠나는 모두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와 함께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사람을 가득 실은 채 문을 활짝 열고 달리는 스리랑카 기차를 타고 산골짜기를 지날 때도, 쇼팽의 심장이 잠들어있는 고요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에서도, 비가 오던 탄자니아 잔지바르섬 골목에서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핀란드 헬싱키로 향하는 페리 침대칸에서도 얼이는 언제나 잘 웃고 잘 먹고 잘 놀다가 곤히 잠들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아이들이 있었다. 어느 곳을 가든 그곳에서도 아이들이 자라고 있으니, 아이와 함께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우리가 여행한 나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이를 환대하고 배려했다. 스리랑카에서는 짐을 치우고 얼이에게 앉을자리를 내어주었다. 헬싱키에서는 식당이나 카페 어디를 가도 아이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질문을 바꾸어 나는 아이에게 어디에서 무엇이 좋았는지 물어본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고 싶다. 얼이는 로스앤젤레스를 좋아한다. 코로나19가 끝나면 어디에 제일 먼저 가고 싶어? 하고 물으면 언제나 엘에이! 하고 대답한다. 단비 이모네 놀러 가는 게 좋기도 하지만 ‘천사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도시에는 놀이공원에 매달아 둔 커다란 색색의 풍선처럼 오색찬란한 즐거움이 있다. 우리는 도시 구석구석을 다니며 그 풍선을 하나씩 찾아냈다. 그 풍선을 붙잡고 새파란 로스앤젤레스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루는 얼이와 박물관의 날을 정했다. 그날에는 둘이서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로스앤젤레스 자연사박물관 Natural History Museum of Los Angeles County과 캘리포니아 과학센터 California Science Center는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자연사 박물관에는 거대한 공룡 뼈 모형과 함께 실제 공룡 뼈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연구실의 일부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어있다. 쥐라기는 지구 상에만 지나간 시기가 아니다. 아이들에게도 한 번씩 공룡시대가 지나간다. 학자들도 공룡에 관한 지식이 가장 많아질 때가 아이가 어릴 때라고 했던가. 책을 읽는 것처럼 다양한 세상을 함축해놓은 박물관을 한자리에서 둘러보며 얼이는 그날 오후 내내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었다. 문 닫을 때까지 있겠다는 얼이를 어르고 달래서 바로 옆에 위치한 과학센터로 갔다. 여기서는 실제 우주왕복선인 엔데버Endeavour호를 볼 수 있다. 엔데버호가 수만 명의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의 환호 속에서 육로를 통해 이곳까지 오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는데 나도 덩달아 마음이 뭉클해졌다. 우주에 관한 전시 외에도 과학에 관한 내용이 총망라되어 얼이가 특히 좋아했다. 다양한 과학원리를 직접 작동하고 체험해볼 수 있게 되어있어서 아이는 과학을 학문 이전에 하나의 놀이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박물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놀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나왔다.


게티 센터 The Getty Center는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장소다.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새하얀 건물부터 넓은 조경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위치까지,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온다. 처음 갔을 때는 얼이가 어려서 유아차를 가지고 다녔는데 아이와 함께 돌아보는 것도 편리하고 정원에서 놀기에도 좋다. 유아를 위한 공간을 ‘가족방 family room’으로 명명한 것도 좋았다. 미국의 재벌 J. 폴 게티의 소장품과 기금으로 조성된 곳이라 입장료가 무료인 것도 장점이다. 미국을 여행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기부로 조성된 공간이 여럿 있다. 영화 ‘라라 랜드’에서 두 주인공이 춤을 추며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장면으로 유명한 그리피스 천문대 Griffith Observatory의 ‘그리피스’도 천문대와 공원 부지를 시에 기증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좋아하는 미술관도 이렇게 만들어졌다. 브로드 부부가 만든 더 브로드 The Broad는 개관하자마자 명소로 등극해 그 무렵 로스앤젤레스에 왔을 때는 모든 예약이 마감되어 아예 가보지 못했던 곳이다. 가장 최근에 갔을 때는 평일 오후에 예약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는데 눈에 띄고 재미있는 작품이 많아서 얼이도 흥미로워했다. 제프 쿤스, 바스키아,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 바바라 크루거, 쿠사마 야오이 등 대중적으로 유명한 대형작품이 많다. 얼이는 어린이용 브로셔를 지도처럼 들고 다니며 작품을 찾았고 나도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많이 얻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유수의 미술관이 많지만 해가 지고 모두 문을 닫은 저녁에는 LA 카운티 미술관 Los Angeles County Meseum of Art에 간다. LACMA 앞에는 수많은 가로등이 모여있는 형태의 야외 전시 작품인 어반 라이트 Urban Light가 있다. 똑같아 보이는 202개의 가로등은 사실 모양이 조금씩 다르고 실제 사용되던 가로등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그 작품이 더 좋아졌다.


미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도시는 시애틀이라고 한다. 2위는 포틀랜드. 비가 많이 오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들이다. 독서율은 강수량과 연관이 있는 걸까?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동안 주말을 이용해 포틀랜드에 갔을 때도 머무는 내내 비가 왔고 우리는 매일 도시 곳곳에 있는 서점에 갔다. 그렇다면 로스앤젤레스는 어떨까. 우리가 갔을 때 비가 온 적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서 검색해보니 로스앤젤레스는 연중 맑은 날이 329일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이 맑고 쾌청한 도시에서 부지런히 서점을 찾아갔다. 왜냐하면 이 도시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서점이 있기 때문에. 그곳이 바로 더 라스트 북스토어 The Last Book Store다. 마지막 서점이라는 이름에 꼭 맞춘 듯 어울리는 이곳은 중고책을 주로 다루고 곳곳에 책과 세월이 쌓여 존재감을 드러낸다. 얼이는 여기 아동서적 코너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2층으로 올라가면 1층 서고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책을 쌓아 올려 만든 작은 북터널도 있다. 내면에 담긴 콘텐츠가 지닌 책의 예술성뿐 아니라 물성으로서 책이 가지는 예술성 또한 깊이 이해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 있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박물관과 미술관, 서점도 좋지만 놀이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할리우드의 도시에 왔으니까. 하루는 단비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셋이서 유니버설 스튜디오 할리우드 Universal Studio Hollywood에 갔다. 가기 전 얼이는 연령대에 맞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몇 편을 열심히 예습했다. 어트렉션을 타기 위해 키도 더 크겠다며 잠도 일찍 자고 밥도 더 골고루 먹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입성하고 얼이가 열광했음을 물론이고 나도 들떠서 영화 속에서의 하루를 만끽했다. 아이가 탑승할 수 없는 어트렉션의 경우에는 보호자가 한 명씩 이용할 수 있도록 따로 대기실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놀라웠다. 특히 여기 다녀온 후로 얼이의 해리포터 사랑은 불이 붙었다. 책은 좋아해도 글은 따로 가르치지 않아서 쓰고 읽는 게 느린 편이었는데 혼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책으로 읽기 시작했다.



여행을 마치고 얼이에게 어디가 좋았는지 물어본다. 혼자 하는 여행과 달리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서로 속도를 맞추고 상대의 마음이나 기분도 헤아려야 하니까. 나처럼 얼이도 거기가 좋았는지 나만큼 얼이도 충분히 즐거웠는지 궁금하다. 어디가 좋았는지 물어보면 항상 얼이는 전부 다 좋았다고 한다. 다시 물어본다. 무엇이 좋았는지. 이제 얼이는 주머니에 주워 모아놓았던 반짝이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전 04화 낯선 도시가 나의 집이 되기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