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지나
첫 책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아주 오래 꿈꾸었던 일이었다. 얼이를 낳고 나서 아이가 밤잠을 세 시간 이상 깨지 않고 잠들게 되었을 무렵부터 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디자인 작업에 복귀했고 매일 일기도 쓰고 있었지만,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긴 글을 쓰고 싶었다. 여행을 떠나면 평소와 달리 계속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기도 하지만 낯선 환경에서 감각이 증폭되어 평소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내게 마치 여행 같았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세 가족의 이야기를 썼다. 여행과 일상에 대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내가 배운 경이에 대해 기록했다. 얼이가 탄 유아차를 들고 지하철 계단을 홀로 오르내리던 날에도, 셋이서 케냐의 초원을 달리고 쿠바 어느 골목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날에도 나는 글을 썼다. 생각과 감정과 경험을 엮어 글을 지었고 여러 계절이 지나 나의 첫 책이 세상에 태어났다. 벅찬 경험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하나를 선택했기에 자연히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묻어두었던 꿈이 여물어 단단한 지면을 뚫고 싹을 틔우는 것을 보았다. 책은 작가 혼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수고와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그렇게 자라고 태어나듯이.
아침이면 포털사이트에 책 이름을 검색해봤다. 올라오는 리뷰를 읽어보았고 몇 번의 북토크도 진행했다. 그러던 중 질문을 하나 받았다. 작가님은 슬럼프가 언제였나요?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을 찾다가 나는 그제야 내가 이미 슬럼프에 잠겨있음을 알았다. 행복하고 들뜨고 설렜지만, 저 아래 깊은 곳에는 슬픔과 분노가 뒤엉켜 괴어있었다.
디자이너는 즉각적인 평가와 닿아있는 직업이다. 피드백을 받는 일은 내게 익숙했다. 익숙하다는 것이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내 작업에 가진 모든 지식과 감각, 열정과 애정을 쏟아붓고 그것을 소개하고 선보이는 일을 사랑했지만 바로 앞에서 곧장 평가를 받는 일에는 아무리 해도 능숙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과 나를 분리하는 법을 잘 몰랐다. 나를 베고 잘라내어 작품을 만들었고, 내가 만든 결과물은 곧 나였다. 사람들의 평가와 반응에 타오르다 얼어붙다를 반복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칭찬에도 혹평에도 무뎌졌다.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혼자 디자인 스튜디오를 시작하고 브랜드를 만들어 제품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이제 클라이언트는 잘게 부서진 채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 전과 다른 점이라면 상품평이라고 적힌 한 줄짜리 피드백을 받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첫 책을 출간하면서 나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가서 닿을지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멀리 띄운 연애편지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고 또 두려웠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다르고, 사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의 마음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도 절망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다른 모양의 마음이 세상에 풍요한 아름다움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출간 후 여러 형태의 답변을 받으며 나는 혼자 글을 쓰던 모든 밤의 위안을 얻었다. 책은 독자에게서 완성된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형태의 말들도 내게 속속 도착했다.
누군가는 자기들 좋자고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는 건 이기적인 부모라고 했다. 비행기나 기차에 아이가 타는 게 너무 싫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다른 누군가는 아이가 다 클 때까지는 아무 데나 가지 말고 마땅히 참고 희생하는 게 부모의 마땅한 도리라고 했다. 누군가는 우리 부부의 관계나 나의 옷차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의견과 폭력의 경계는 어디인지. 상대는 내 얼굴을 알지만 나는 누군지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뒤집어쓴 오욕이 곪아 속에서 쓴 내가 났다. 나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구든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다면 나는 글에 대한 비판이 아닌 삶에 대한 비난은 그냥 무시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자기 검열을 시작했다. 얼이와 함께 다니면서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얼이를 그 전보다 훨씬 더 자주 혼냈다. 나는 평소에도 아이를 엄하게 기르는 편이다. 아이와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한 생의 방식을 배워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공장소에서의 예절과 타인에 대한 예의를 배우지 않고 아이와 여행을 지속할 수는 없다. 내가 얼이와 어디든 함께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와 매일을 함께 하면서 우리가 서로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이도 어른도 익숙해지면 어렵지 않다. 얼이도 여느 아이들과 같다. 의자에 신을 벗고 올라가는 것,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것, 목소리의 크기를 조절하는 법, 음식을 흘리지 않고 먹는 법. 모두 하나씩 천천히 매일 반복하며 배웠다. 다만 더 많은 여행을 떠나고 날마다 나와 함께 있었으니 연습할 기회가 더 많았을 뿐이다. 아이들의 실수는 아직 모르기 때문일 때가 많다. 아이의 미숙함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배우고 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다.
그즈음 얼이와 단둘이 미국에 갔다. 저렴한 항공권으로 구매했더니 중간에 경유를 해야 했는데, 수화물을 찾아서 카트로 이동해 다시 보내야 하는 공항이었다. 비행시간마저 아주 늦었다. 그러나 우리 둘 다 게임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것처럼 즐겁게 무거운 가방을 옮기고 긴 줄을 서고 낯선 공항을 둘러보고 탑승을 기다렸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도 힘들지 않았다. 종이접기를 하고 영화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이야기도 나누고 잠들었다 일어나 밥을 먹으니 이제 미국이었다.
얼이와 나는 천천히 로스앤젤레스를 여행했다. 횡단보도 근처로 다가가기만 해도 차들이 멈추는 도시에서 야트막한 보도블록 위를 걸었다. 얼이는 평소에 버스를 탈 때면 휠체어석에 어떻게 휠체어가 고정되는지 늘 궁금해했는데,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에 타고 내리는 것을 실제로 처음 보았다. 다 자란 어른인 나도 휠체어를 타고 놀이공원에 놀러 온 사람들을 그 여행에서 처음 보았다. 환한 대낮에 환경미화원이 거리를 쓸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식당에 가면 주문을 받기 전 제일 먼저 아이에게 그림 그릴 종이와 크레용을 가져다주었다. 도시 곳곳 세련되고 허름하고 붐비고 고요한 모든 곳에서 나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 무렵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과 김현경 작가의 ‘사람 장소 환대’를 읽었다. 사회 안에는 약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이 드러나고 자리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그 사회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연약하게 태어나 다시 약자로 나이 들어갈 것이다. 다만 잊고 있을 뿐. 지금도 언제든 소외될 수 있고 우리에게 익숙한 곳을 떠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약자가 될 수 있다. 실상 내게는 잠시나마 이방인이 되고자 떠난 여행이었고, 나는 로스앤젤레스를 걸으며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날도 시내에서 퇴근한 단비를 만나 저녁을 먹고 장을 보러 마켓에 들른 참이었다. 단비는 뭔가를 찾으러 잠깐 자리를 비웠고, 얼이는 한껏 신이 나서 진열된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종일 돌아다녀서 피곤했고, 얼이가 이것저것 만지지 않도록 계속 따라다니며 주의를 주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때 한 노부인이 내게 다가왔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스치기만 해도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잦았다. 나는 찌푸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분이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보이며 내게 말했다. 아이가 정말 귀여워요! 나는 순간 멍해졌다. 그 온기 가득한 문장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꼭 말해주고 싶었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며 내게 다시 그리고 얼이에게도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가올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본인의 휠체어를 밀며 사라졌다. 그리고 여행 내내 비슷한 일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도시가 이방인을 환대하고 약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다양한 이들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내가 지나온 시절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 대해. 시간과 공간을 기꺼이 내어 기다려주는 배려에 대해. 고단함으로 그조차 잠시 잊은 이들을 넌지시 일깨워주는 그 온화함에 대해. 나는 오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