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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나 Oct 24. 2021

잃어버린 사줌이


글. 이지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평소에 여행할 때면 가능한 하루에 일정을 하나만 정한다. 꼭 하고 싶은 것, 아니면 꼭 가고 싶은 곳 하나. 그 외에는 느슨하게 시간과 공간을 비워둔다.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 변수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날은 마지막 날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마지막 날. 되도록 자주 오고 싶지만 늘 그렇듯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여행의 마지막 날. 오늘 할 일은 이제 더 이상 내일로 미룰 수 없고, 하고 싶은 일은 오늘 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기회를 만날지 알 수 없다.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것들도 오늘은 구입을 해야 하고 꼭 가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일도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공항으로 가기 전 짐을 정리하고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 캐리어는 활짝 열린 채 옷가지며 세면도구까지 구석구석 흩어져 있었다. 매일을 여행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아마 나는 좀 더 부지런해지고 내 일상의 밀도는 높아지겠지.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고 실수는 반복되는 것임을.


오늘은 일정이 아주 많았다. 얼이와 꼭 가고 싶었던 카페에 갔다가, 몇 군데 들러서 집에 가져갈 것들을 사고, 장을 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얼마 남지 않은 단비의 깜짝 생일파티를 열어줄 생각이었다. 단비는 아침 일찍 출근하면서 휴대폰 로밍도 하지 않고 유심도 구입하지 않은 나를 위해 자기 휴대폰을 두고 갔다. 출근해서는 내내 회사에 있고 오늘은 퇴근 후 집에서 만날 예정이었으니 괜찮다며 지도도 볼 겸 여러 곳을 들러야 하는 내가 사용하라고 했다.

단비가 출근하자마자 얼이와 머리를 맞대고 단비에게 줄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생일 케이크 위에 꽂을 장식을 만들었다. 짐이 많아질 예정이라 크고 가벼운 가방에 간단히 필요한 것만 챙겨 들었다. 얼이는 작은 강아지 인형인 사줌이를 데리고 가겠다며 손에 꼭 쥐고 집을 나섰다. 우리는 멜로즈 에비뉴의 어스Urth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을 생각이었다. 단비가 접이식 휴대용 카시트를 챙겨주며 우버를 타고 다니라고 했지만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나는 얼이와 서울시내를 다니거나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도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주로 걸어 다닌다. 목적지에 빠르고 편리하게 도착하는 것도 좋지만 도시에 발을 딛고 찬찬히 살피고 겪어가는 과정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편리한 것과 편안한 것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거리를 걸으며 하곤 한다.

물론 로스앤젤레스의 거리와 교통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고, 나는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가끔 길을 잃는 놀라운 방향감각의 소유자이며, 서울처럼 빠르고 쾌적하고 촘촘한 연결망을 갖춘 도시는 많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마지막 날을 조금씩 아껴누리기 위해 천천히 가기로 했다.

버스정류장까지는 우리 걸음으로 이십 분쯤 걸렸다. 평소처럼 둘이 손을 잡고 흥얼흥얼 노래도 부르고 끝말잇기도 하면서 걸었다.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버스가 도착했다. 유아차와 휠체어를 기다려주는 이 도시의 버스를 우리가 좋아했듯 어딘가에서 다른 이들도 기다려주었기 때문일테다. 모두가 조금씩 나누어 준 시간을 싣고 버스는 시내를 통과해 달렸다. 낯선 지명에 귀를 기울인 끝에 드디어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지만, 내려서 또 한참을 걸어야 했다. 덕분에 도착할 즈음엔 브런치가 아닌 런치를 먹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도로변에 놓인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피자와 신선한 주스, 모둠 과일이 담긴 플레이트를 주문했다. 조금 기다리자 테이블 위로 고소한 냄새와 함께 색색의 달콤한 음식이 놓였다. 시간은 거리를 스쳐가는 사람들보다 느린 속도로 흐르고 주위의 대화 소리는 음악과 소음에 적당히 뒤섞여 배경처럼 놓였다. 얼이는 기분 좋게 과일을 하나하나 맛보고 우리는 가장 맛있는 조각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달뜬 기분으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식사는 금방 끝났다. 얼이와 나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정리하기 위해 다가오는 직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왔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는 금세 다른 이들로 메워질 것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더 그로브 The Grove였다. 우리는 거리를 구경하며 걸어가기로 했다. 걸으면서 얼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을 치고 사진을 찍었다. 눈에 띄는 가게마다 들어가서 구경하고 단비와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가는 길에 들르려고 마음먹었던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를 발견했다.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며칠 후면 단비 생일이었고, 혼자서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할 단비를 위해 좋아하는 바나나 푸딩도 사고 컵케이크로 생일 케이크를 만들 생각이었다. 얼이와 나는 쇼케이스를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컵케이크들을 골라 박스를 채웠다.

가게를 나서자 이제 양손이 묵직해졌다. 나는 한 손에 커다란 케이크 상자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다른 쪽에는 팔에 가방을 걸친 채 얼이의 손을 잡았다. 더 그로브가 코앞이었다. 좋아하는 곳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내내 와보지 못했던 참이었다. 우리는 더 그로브를 둘러보고 홀푸드에서 장을 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얼이가 우뚝 멈춰 섰다. 내 손을 꼭 붙든 채로.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사줌이 어딨지?”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머리가 아찔하면서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쭉 퍼졌다.

사줌이를 본 기억이 없다. 얼이는 내게 물으면서 이미 눈동자가 일렁일렁했다. 빠르게 가방을 뒤적였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줌이가 없어졌다는 걸.

사줌이를 잃어버렸다. 황급히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없었던 거지.


얼이는 집에 있는 모든 인형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뭥머와 삼촌에게 선물 받은 작은 강아지 인형 키즈를 특히 좋아했다. 뭥머는 남편과 내가 얼이에게 선물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자게 될 때 어린 얼이에게 어디든 데리고 갈 수 있는 익숙한 안정감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이케아가 아직 국내 매장을 오픈하기 전 셋이 함께 갔던 대만 가오슝 여행 중에 구입했다. 이제는 집마다 한 마리씩 있을 것처럼 흔해졌고 이케아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얼이는 제 하나뿐인 친구를 알아보고 구분해낸다. 뭥머만의 감촉과 체취가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얼이는 모든 장거리 여행을 뭥머와 함께 했다.

그다음으로 좋아한 친구는 작은 강아지 인형 키즈였다. 뭥머는 그래도 좀 크니까 멀리 가거나 밖에서 자고 올 때만 데리고 다녔는데, 키즈는 내 손바닥 정도 크기라 얼이가 어디든 데리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날도 얼이는 바깥 구경을 시켜주겠다면서 외투 주머니에 키즈를 담아 넣고 집을 나섰다. 키즈가 볼 수 있도록 주머니 밖으로 얼굴을 쏙 꺼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날은 약속이 있어서 남편과 나와 얼이가 함께 버스를 타고 종로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 걷고 있는데, 일순간 얼이가 깜짝 놀라면서 멈춰 섰다. 주머니에 넣어둔 키즈가 사라진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눈물범벅이 된 얼이 얼굴밖에 기억이 안 난다.

얼이는 정말 슬퍼하며 목놓아 울었다. 엉엉 우는 얼이의 손을 잡고 걸어온 거리를 거슬러 올라 버스정류장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키즈는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키즈를 찾아 거리를 몇 바퀴 돌다가 남편은 얼이를 데리고 문구점에 들어갔다. 그렇게 얼이는 사줌이를 처음 만났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그 자리에서 바로 이름을 지어줬다. 새로운 친구의 이름은 사줌이. 아빠가 ‘사줌’이라서 사줌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눈앞이 하얘졌다. 짧은 한기가 가시고 따사롭다고만 생각했던 햇빛 아래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그제야 피부가 달궈지는 느낌과 함께 땀이 솟았다. 얼이 눈에 빠르게 물기가 차오른다 싶더니 이내 커다란 눈물 방울이 뚝뚝뚝 떨어졌다.

하필이면 사줌이라니. 사줌이는 포기할 수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온갖 생각을 했다. 걸어온 길을 되짚어 더듬어봐도 도무지 모르겠고 그 먼 거리를 당장 되돌아가자니 막막했다. 무엇보다 어디에서 잃어버린 건지, 다시 찾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우리는 여행의 거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지며 늦은 오후에 접어들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공항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긴 비행을 해야 했다. 방법을 찾고 경우의 수를 계산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고 오류가 떴다. 나는 울고 있는 얼이의 손을 잡고 한 손에는 커다란 케이크 상자를 든 채 로스앤젤레스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마침내 한없이 길게 느껴졌던 버퍼링이 끝나고 나는 얼이를 달래서 일단 그늘 아래 의자에 앉혔다. 아무래도 사줌이는 어스 카페에 놓고 온 듯했다. 이건 확신보다는 바람에 가까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후로는 본 기억이 없고 잠깐 들른 다른 가게나 길에 떨어트렸다면 다시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워낙 사람이 붐비는 카페여서 그 작은 인형을 찾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가지고 있던 단비 휴대폰으로 가족 단톡방에 이 엄청난 비극을 알리고, 어스 카페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전화가 연결됐지만 통화가 원활하지 않았다. 주위 소리가 시끌시끌해서 카페 직원은 내 말이 잘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거의 랩 배틀 파이널 라운드에 등판한 래퍼처럼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몇 시간 전 카페에 갔었고 어느 쪽 테이블에 앉았는데 작은 강아지 인형을 두고 온 것 같아요. 혹시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작고 밝은 갈색 털이예요. 그러다 상대방이 ‘인형’을 빼고 ‘강아지’만 듣고는 깜짝 놀라며 내게 되물었다. 네? 강아지요?! 나는 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요. 인형이에요. 작은 강아지 인형이요. 이번엔 최대한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안타깝게도 통화의 소득은 없었다. 분실물은 들어온 게 없고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고 나니, 얼이가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내내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회사 컴퓨터로 카톡을 보고 실시간으로 비보를 전해 들은 단비는 주말에 자기가 직접 어스 카페에 찾아가 보겠다고 얼이에게 약속했다.

나는 그제야 눈물을 그친 얼이와 홀푸드로 갔다. 저녁은 단비가 먹고 싶어 했던 닭볶음탕과 제육볶음을 만들 생각이었다. 생닭 한 마리와 돼지고기, 각종 채소, 꽃까지 한 다발 사고 나서야 가까스로 단비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그날 저녁은 여행의 마지막 몇 시간답게 우당탕탕 지나갔다. 단비가 퇴근하기 전 상을 차려놓고 짜잔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도착하니 이미 단비가 먼저 집에 와있었다. 함께 요리를 하고 녹아서 모양이 망가진 컵케이크로 생일 케이크도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부랴부랴 짐을 캐리어에 밀어 넣은 뒤 공항으로 향하는 우버를 불렀다. 우리 비행시간은 늦은 저녁이고 단비는 내일도 일찍 출근해야 하니 배웅은 집에서 하고 나오지 말라고 했다. 차는 금방 도착했고 우리는 아쉬움을 나눌 새도 없이 집 앞에서 정신없이 헤어졌다.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은 시내를 빠져나가는데 벌써 이 도시와 단비가 그리워져서 나는 조금 울었다. 옆자리에 앉은 얼이도 훌쩍이길래, 얼아, 얼이도 슬퍼? 했더니, 얼이가 응 엄마. 나도 슬퍼. 하고는 창밖을 보면서 사줌아 사줌아 하고 불렀다.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마지막 밤. 공항으로 향하는 우버 안에서 우리는 각자 두고 온 것을 그리며 이 도시와 작별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얼이는 곧바로 단비에게 연락해 사줌이 소식을 물었다.

그리고 단비가 여러 번 연락을 주고받고 카페를 오간 끝에 마침내 사줌이를 찾을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이 도와주었고 사줌이를 찾아주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단비는 사줌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얼이에게 보내주었다. 얼마 뒤 사줌이는 단비가 보낸 선물들과 함께 우리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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