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단비
2010년 4월 인천국제공항. 지나 언니와 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씩씩하게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백팩을 메고 새 신을 신고, 아자아자 파이팅. 잘할 수 있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 아빠 목소리에 눈물을 꾹 참으며 로스엔젤레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으로 떠나는 첫 여행이었다. 그 여행이 얼마나 길어질지 그때는 몰랐다. 비행기 안에서 밤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기나긴 비행 끝에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2021년 10월. 어느덧 10년. 나는 여전히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2010년 졸업을 앞둔 나는 여느 취업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었으며 면접을 보러 다녔다. 나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내 기억이 닿는 아주 어릴 적부터 옷이 좋았고, 좋아하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며 꿈을 키웠다. 그래서 나는 취업이 기다려졌다. 진짜 내 꿈에 한 발 다가간 기분이었고,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할 수 있다는 게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그러던 중 드디어 첫 면접이 잡혔다.
"새끼 디자이너를 해야 해요. 동대문은 매일 나가게 될 거예요. 사무실에서 필요한 부자재를 본인이 매일 공급해야 하거든요. 외근 나가는 시간이 일의 절반 정도라 생각하면 돼요. 그러다 보면 야근도 많아지고 집에 못 가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우리 애들 보면 찜질방에서 자기도 해요. 아, 월급은 60만 원이에요. 아침에는 7시까지 와서 준비해주세요. 원래 새끼 디자이너가 그래요. 참! 토요일에도 격주로는 출근을 해야 하는 거 알아두시고요."
그게 내가 처음 겪은 세상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인사를 하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아침 5시부터 준비해서 달려갔는데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 당시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보다 적은 금액에 훨씬 많은 근무시간이었다. 원래 이런 거야? 아무리 패션업계가 힘들다지만 이건 아니지 않아?
면접을 마치고 나와서 면접을 봤던 회사가 위치한 가로수길을 정처 없이 걸었다. 뒤늦은 허기가 밀려와서 길가 아무 카페에 들어갔다. 지갑에 있는 돈을 확인해보니 4천 원이 전부였다. 작은 빵과 아메리카노로 구성된 3800원짜리 세트 메뉴가 눈에 띄었다. 직장인을 위한 아침메뉴라고 적혀있었다. 그전까지는 쓴맛이 싫어서 한 번도 아메리카노를 마셔본 적이 없었지만 그 아침에는 그냥 그 메뉴를 주문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인지 심경의 변화였는지는 모르겠다. 그 아침에 나는 처음으로 아메리카노를 달게 마셨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신기하지? 나 오늘 면접 보고 처음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커피가 쓰지 않더라? 그 얘기를 듣던 언니가 말했다. 인생의 쓴 맛을 봐서 그런가 봐. 인생이 쓰면 소주가 달대. 이제 어른이 되었나 봐.
그러나 그날 내가 맛본 것이 인생의 쓴맛인지 알지 못했던 어른의 단맛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같이 조교실 갈래?? 나 해외 인턴쉽 신청하려고. 너도 해봐"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 공고문이 하나 붙었다. 미국 해외 인턴쉽 교류. 미국.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최대한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경험해보고 싶은 것이 나의 버킷리스트였지만 가보고 싶은 수많은 나라 중에 미국은 없었다. "미국은 난 별로. 영어도 못하는데 뭐"
그래도 좋은 기회 같은데 그냥 한번 해볼까. 넣는다고 다 되겠어? 큰 열의는 없는 채로 친구를 따라 조교실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덜컥 신청서를 썼다. 열정 페이는 싫어도 취업은 필요하니 뭐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취준생의 조바심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신청을 한 것조차 잊었을 즈음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인턴쉽 넣은 게 되었으니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준비하라는 연락이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포트폴리오와 이력서, 성적표를 들고 학교와 연결된 에이전시를 방문했고, 면접이 이어졌다. 곧 합격 발표가 나고 출국을 준비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가 영어를 정말 아주 몹시 싫어한다는 것.
그렇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영어가 정말 싫었다. 영어시간만 되면 손에 땀이 나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배가 아플 정도였다. 나는 이 언어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영어가 점점 더 싫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이라니. 그날 가로수길에서의 면접이 내 등을 힘껏 떠밀었던 걸까. 나는 얼떨결에 비자 발급을 위한 대사관 인터뷰를 앞두고 있었다.
"쏼라쏼라 (아마도 왜 미국에 가냐고 물어봤겠지?)"
"아임쏘리, 아이 돈 스피크 잉글리시 베리 웰. 플리즈 스피크 어 리틀 슬로"
"엄… 돈 받아요?"
"하하하하하, 네 받아요"
"왜 가는지 알아요?"
"일하러 가요. 의류회사. 옷"
"그래요. 잘 다녀와요. good luck."
"감사합니다. 땡큐."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너무 떨렸던 인터뷰는 예상과 달리 짧고 유쾌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바로 비자가 승인되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 후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출국했다. 생각해보니 전부 우연이었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갔다가 생각에도 없던 미국 인턴쉽을 신청하게 되었고, 물 흐르듯 준비하고 면접에 합격까지. 비자를 받는 과정은 즐겁기까지 해서 미국으로 떠나는 내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내가 미국에서 일을 한다니. 내가? 정말?!
글. 이지나
첫 미국 여행지는 로스앤젤레스가 아니었다. 아이가 15개월 즈음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얼이가 태어나고 셋이 되어 하는 첫 여행이었다. 결혼 전에는 혼자서 그리고 결혼 후에는 둘이서 여러 나라를 여행했지만 미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인지 미국은 너무 멀고 너무 크고 너무 넓었다. 어릴 적엔 반 친구 누구 친척이 미국에 산다더라 하는 식으로 건너 건너 듣느라 아득히 낯설었고, 대학에 오니 미국 한번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 흔해서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SNS며 방송에도 자주 등장했다. 가보지 않았는데도 도시 풍경이 눈에 익을 만큼 익숙해졌다. 여행은 언제나 제한된 시간과 비용 안에서 선택해야 하는 일이니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은 선택지에서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첫 여행지를 찾으면서 남편과 내가 모두 가보지 않은 나라 중에 그때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을 택했다. 그게 미국이었다.
미뤄두었던 휴가를 모아서 일정을 정했고 단비가 주말을 이용해 국내선을 타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오기로 했다. 우리는 단비에게 전할 커다란 이민가방을 챙겼다. 가방은 온 가족이 보내는 선물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날. 입국신고를 하고 공항카트를 밀며 입국장으로 향했다. 해외에서 우리는 맞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고 설렜다. 몇 년 만에 단비를 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달궈지며 일렁거렸다. 드디어 눈앞에서 문이 열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해 가볍게 들뜬 공기로 채워진 입국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단비가 보이지 않았다. 엇갈리거나 못 찾는 건가 싶어 꼼꼼하게 둘러보았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조금 늦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비행 내내 꺼두었던 휴대폰을 그제야 켰다. 외교부와 통신사에서 문자가 밀려드는 와중에 단비가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뭔가 문제가 생긴 듯했다. 서둘러 대화창을 열어보니 실시간으로 전송한 상황설명 아래 도착하는 대로 연락 달라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부랴부랴 전화했더니 단비는 그 순간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시차 때문에 우리가 오는 날을 착각한 건지 아니면 중간에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단비가 짐을 챙겨서 공항에 도착했는데 체크인하려고 보니 예매한 항공권이 내일 날짜 티켓이었던 것이다. 당황한 단비는 다급하게 우리에게 연락했지만 우리는 이미 태평양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안이었다. 각자 덩그러니 다른 공항에 있게 된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가족 단톡방에 소식을 전하니 다들 그저 깔깔 웃었다. 차로 운전해서 오는 것도 잠시 고민했는데 돌아가는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래도 무리였다. 어쩔 수 없지. 단비는 집에 돌아가서 자고 다음날 그 항공권으로 무사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우리에게 줄 선물이 담긴 자기 몸만 한 이민가방을 끌고.
두 번째 미국 여행은 온 가족이 함께 갔다. 아빠의 환갑이었고 이런저런 경사와 그럴듯한 이유와 그리움, 그리고 모두의 휴가와 연차를 조각이불처럼 모아 붙여서 여행 일정을 만들었다. 엄마 아빠는 단비가 한국을 떠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게 된 뒤 처음으로 단비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고, 내게도 엄마 아빠와 하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엄마, 아빠, 나와 얼, 둘째 희나가 함께 떠났다. 여행은 조각보처럼 다채롭고 빈틈없이 채워졌다.
우리는 아빠 생신날 출국했다. 저녁에 출국해서 밤새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는데 여전히 아빠 생신이었다. 단비네 집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빠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불었다. 다들 밤이 깊도록 짐과 이야기를 보따리처럼 풀어놓았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내가 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우리 가족과 나의 여행 방식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세계 테마 기행’의 애청자다. 시간을 맞춰 재방송까지 거르지 않고 본다. 여행도 즐겨보는 방송들처럼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걷고 최선을 다해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간다. 시차적응이 뭐죠? 우리는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세코야 국립공원을 시작으로 집을 나선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빡빡하게 꽉 채운 일정을 보냈다.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 나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나는 당시 세 살이던 얼이와 함께 무려 미국 서부 패키지여행에도 실려갔다. 관광버스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내 생애 첫 패키지여행이었다. 해외에 나와서 이렇게 많은 한국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독특한 경험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나 이국의 그것인데 우리는 마치 캡슐에 담긴 것처럼 익숙한 언어로 설명을 들으며 편리하게 이동했다. 다행히 얼이는 장거리 이동에도 힘들어하지 않았고 가는 곳마다 즐거워했다. 오히려 그 여행에 적응을 못한 건 나였다. 그 여행은 내 마지막 패키지여행이 되었다. 그래도 애틋하고 유쾌했다. 낮에 보는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은 뜨거운 햇살 아래 색이 바랜 책 커버 같았다. 선명한 도시 풍경 위로 한글간판들이 콜라주처럼 놓였다.
가장 최근에 다녀온 로스앤젤레스 여행은 나와 얼이 단둘이 갔다. 2019년 봄이었다. 그즈음 한국은 미세먼지로 뒤덮여있었다. 마음껏 환기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얼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비가 아니라 미세먼지 때문에 소풍이 취소되기도 하고, 하늘이 맑아도 놀이터에 나가 놀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눈과 목이 아프고 이전에는 겪어보지 않았던 미세한 두통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몇 년 전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지구가 먼지로 점령당하는 장면을 보며 왜 저런 설정을 했을까 생각했었다. 그때 누군가 정말 저런 날이 온다고 얘기했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지바람이 부는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또 누군가 미세먼지가 없어도 모두 마스크를 쓰는 날이 온다고,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는 날이 온다고 얘기했다면 나는 그 역시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 봄에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아침마다 미세먼지 지수를 확인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만족감이 높아졌다. 일곱 살이 된 얼이와 나란히 손을 잡고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카페에 마주 앉아 느린 오후를 보내며 책을 읽었다.
누구에게나 고유한 성향과 변하지 않는 생김새가 있다. 그러나 계절과 상황에 맞춰 차림이 달라지고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성격의 다른 면이 드러난다. 가까운 가족이 보는 나와 일로 가끔 만나는 지인이 보는 나는 분명 다를 것이다. 여름과 겨울의 나, 캠핑장에서의 나와 결혼식에 참석하는 나 역시 다른 모습일 것이다. 한 사람이 이럴진대 하물며 수많은 사람과 환경이 모여 거대한 유기체를 이루는 도시가 보여주는 모습은 얼마나 시시각각 다를까. 내가 만난 로스앤젤레스도 시기에 따라, 함께 여행하는 사람에 따라, 때로는 도시를 찾아간 내 마음에 따라 매번 달랐다. 여행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에도 분명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단비에게 로스앤젤레스가 마치 소개로 만나 서로 내외하다가 오랜 시간을 두고 뭉근하게 정이 든 사이라면, 내게 있어 로스앤젤레스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한눈에 반해서 설레고 가슴이 뛰었다. 자주 못 봐서 더 생각나고 매번 헤어지기 아쉽고 자꾸만 보고 싶다. 이렇게 길고 긴 연애편지를 쓸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