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효율적으로 살 수 있을까
『피로사회』(한병철, 2012) ,『단單』(이지훈, 2015),『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이근후, 2013)에서 만난 삶에 대한 힌트.
긍정성의 과잉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알랭 에랭베르는 오늘날의 인간형을 니체의 주권적 인간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자기 자신을 닮은 주권적 인간 – 니체는 그러한 인간의 도래를 예고한 바 있거니와 – 은 바야흐로 대중의 현실이 되려는 중이다. 주권적 인간에게 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명할 수 있는 상위의 존재는 없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소속된다는 원칙에 따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 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Schaffens- und Könnensmüdigkeit)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Nicht-Mehr-Können-Können)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긍정성의 과잉 시대, 성취와 승리를 위한 삶들 속에 부정성은 설곳이 없다. 긍정성 과잉은 개인의 우울증과 같은 개인적인 병도 부르겠지만 사회적 병리 현상도 유발한다. 면역학적 관점을 적용해 본다면, 순수하고 완전무결한 긍정을 통해서만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건 아닐텐데.
자기 착취가 타자의 착취보다 자유롭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 무섭지만, 그래도 자유로운 느낌을 주는 자기 착취가 차라리 더 나을까? 그런데 착취의 효율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인생은 효율적인가?
자기 착취에 대한 변명
성공한 25명의 공통점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삶을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입니다. '나는 일도 하고 싶고, 개인적인 취미 생활도 즐길 것이며, 가족과 친구도 만날 것이다'라는 신념을 꺾지 않았어요. 주변의 많은 사람이 계속 참견했습니다. '지금처럼 하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어요. 그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오히려 일의 생산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몹시 어려운 문제를 회사에 오래 앉아 있는다고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새로운 시각이 필요할 때는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해야죠. 하고 싶은 걸 해야 합니다. 온종일 책상 앞에서 고민하는 건 문제를 푸는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피곤한 삶이 높은 연봉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베레가드는 주장한다. 진짜 돈을 버는 법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사회에 이득이 된다면, 도움을 받은 사람이 돈을 지불할 것이므로 돈 버는 일은 너무 염려하지 않다도 된다는 것이 베레가드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그는 일에 들이는 시간보다 일에 투여하는 집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6시간 일한다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12시간 일한다고 두 배의 성과를 얻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50시간이 아니라 70시간을 일할 때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믿는다며 베레가드는 안타까워했다.
이지훈, 『단單』
착취는 '피곤한 삶이 성공을 가져다준다'고 믿게 만든다. 타인의 착취도 무섭지만 더 안타까운 건 그렇게 스스로 옭아맨 굴레를 불평하고 사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네팔인 친구 라즈반다리 씨와 히말라야 고산 트래킹을 갔을 때였다. 2주 동안 5000미터 고봉을 걷는 일정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도 내 눈은 늘 고봉에 가 닿아 있었다. 저기 어디쯤에 목적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꽤 높이 올라갔을 즈음, 앞서 걷던 라즈반다리 씨가 갑자기 땅바닥에 앉더니 나보고 옆에 와서 누워 보라고 했다. 그는 뜬금없이 물었다.
"이 선생, 무슨 소리 안 들립니까?"
"무슨 소리요?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요?"
라즈반다리 씨는 자꾸만 무슨 소리가 안 들리느냐고 여러 번이나 물었다. 미안해서 들린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가만히 누워 있으니 정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풀벌레 소리였다. 바람소리도 들렸다. 옆으로 눈을 돌리자 벌레들이 꾸물거리고 개미도 열을 지어 기어가고 있었다. 아! 거대한 히말라야도 이런 작은 미물을 품고 있었구나! 나는 놀랐다. 히말라야를 다닌 지 수년이 넘었는데 나는 언제나 높은 산봉우리만 바라본 것이다.
이근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높은 곳만 보고, 목표만 보다가 쉽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주변의 풀벌레 소리, 바람소리를 듣는 일. 사소한 아름다움에 기쁨을 얻는 일은 꼭 히말라야 5,000 고봉에 오르는 모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게 아닐 것이다. 오늘은 내가 내게 허락하는 자유, 잠시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를 내봐야겠다. 노학자가 쓴 '나는 죽을 때까지 효율적으로 살고 싶다' 같은 책은 나오지도 않을 테니까.